봄에는 벚꽃, 겨울엔 붕어빵…바늘과 실로 뜨는 나만의 ‘애착템’ [ESC]

한겨레 2024. 8. 1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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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뜨고 있는 뜨개질
코바늘·돗바늘과 실뭉치로 파우치, 인형 옷, 게임 캐릭터 등 만들어
1박2일 뜨개캠프, 대학 소모임, 뜨개팅까지…엠제트세대 관심 고조
고민 사라지는 몰입, 교류도 가능…“지친 몸과 마음, 힐링되는 취미”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뜨개공방에서 코바늘로 가방을 뜨는 모습. 초보자들이 작은 파우치를 만드는 데 2~3시간 정도 소요된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집게손가락에 실을 걸고, 엄지와 중지는 실을 잘 잡아요. 그러고는 바늘 끝 갈고리 부분에 실을 꿰서 구멍에 넣고 쏙 빼면 돼요. 이런 간단함이 요즘 엠제트(MZ) 세대 사이에서 ‘뜨개 바람’이 부는 가장 큰 이유 아닐까요?”

서울 마포구에서 20년째 뜨개공방을 운영해온 박형아(53) 원장은 ‘코바늘 초보자’를 위한 준비물을 익숙하게 책상에 늘어놓으며 말했다. 그간 ‘할머니의 취미생활’ 정도로 여겨졌던 뜨개질이 최근 20~30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힐링 취미’로 인기를 끌면서 공방을 찾는 연령대가 부쩍 낮아졌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공방 책상에 놓인 준비물은 간단했다. 15㎝ 정도 길이의 끝이 갈고리처럼 생긴 코바늘 하나, 분홍색과 초록색 실 두 뭉치, 그리고 마무리 작업에 쓰일 짧은 돗바늘이 전부였다. ‘바늘과 실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무엇이든 다 만들어낼 수 있다’던 에스엔에스(SNS)상의 뜨개 예찬론자들의 말은 진짜였다.

수준 차이 나도 함께 즐기기

서울 마포구에 있는 뜨개공방 ‘박형아는 뜨개쟁이’의 벽 한 쪽에 걸려있는 뜨개 작품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지난 8일 서울 마포구의 뜨개공방 ‘박형아는 뜨개쟁이’에서 일일 수업을 들었다. 초보자에게 딱이라는 미니 파우치를 만들기로 했다. 재료를 확인한 뒤 도안을 보며 먼저 뜨개질의 기초 공사가 될 ‘코’를 잡기 시작했다. 공방을 찾기 전, 뜨개 유튜버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이 올려둔 ‘초보들을 위한 뜨개 영상’을 여러번 보고 왔는데도, 역시 실전은 달랐다.

처음에 손에 실을 거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실을 쥔 집게손가락은 제멋대로 구부러지다 부드러운 실을 계속 떨어뜨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 어느 정도 꿰어졌다 싶었는데 이번엔 코가 나와야 할 구멍을 잘못 찾았다. 실을 꿰며 풀며 한 시간 넘게 씨름한 끝에 가방의 밑바닥 부분을 겨우 완성했다. 수업을 듣는 중에도 박 원장의 인스타그램 다이렉트메시지(DM)와 문자메시지로는 “휴가지에서 입을 수영복 가운을 뜨개로 만들고 싶다”, “헤드셋 커버를 만들러 가겠다” 같은 20대 뜨개 초보자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60초짜리 짧은 동영상인 ‘쇼츠’를 좋아하고, 뭐든 쉽고 빠른 것을 추구한다던 요즘 엠제트가 이런 느긋한 취미에 빠져 있다고?

뜨개공방을 운영하는 박형아 원장.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지난달 초, 경기도 파주의 한 펜션에는 평소 일면식도 없지만 단지 ‘뜨개질’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엮인 뜨개인 20명이 한데 모였다. 인스타그램에서 인기 뜨개질 계정을 운영하는 젊은 ‘뜨개 인플루언서’ 3명이 연 ‘1박2일 뜨개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종일 뜨개질에 대한 정보를 나누거나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 3시에 만나 그날 새벽까지,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뜨개질을 했다. 숙소 퇴실 시간이 되자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서까지 계속 뜨개질을 했다.

이 모임의 주최자이자 ‘코바늘 홀리’라는 닉네임으로 팔로어 수 6만3000명의 뜨개질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는 홍성애(24)씨는 “캠프 공고를 올린 당일 15만원이나 되는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20명 정원이 금방 차서 뜨개질에 대한 높은 관심을 새삼 느꼈다”며 “(이번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뜨개인들이 많아 올가을쯤 인원을 늘려 다시 캠프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캠프를 찾은 이들은 “1박2일 동안 뜨개질에만 몰입하다 보니 고민거리가 사라진 것 같다”, “소심한 성격이라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뜨개질이라는 공통분모로 교류할 수 있어 좋았다”며 만족감을 보였다.

뜨개질은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하다는 점이 매력이라는 게 홍씨의 설명이다. 혼자도 할 수 있지만, 마음이 맞는 ‘뜨개 친구’를 사귀면 사용하는 실에 대한 정보나 도안을 공유하며 교류하는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다. 취미에 대한 숙련 정도가 다르면 웬만해선 함께 어울리기 힘든 다른 동호회와 달리, 뜨개는 각자 속도대로 작업하기 때문에 수준 차이가 꽤 나더라도 한 공간에서 함께 즐길 수 있다.

“처음엔 어렵지만,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

벚꽃 키링. 홍성애 제공

2년 전 뜨개질에 흥미가 생겨 본격적으로 관련 인스타그램까지 시작했다는 홍씨는 독특한 뜨개질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었다. 홍씨가 계정에 공유하는 뜨개질 결과물은 털목도리나 카디건처럼 흔히들 생각하는 뜨개질 아이템과는 거리가 멀다. 겨울에는 갈색 실을 활용해 붕어빵 인형을 만들고, 봄에는 보라색과 분홍색 실을 조합해 벚꽃 모양 열쇠고리를 만든다. 작은 10㎝짜리 인형을 만든 다음 그 인형의 옷이나 가방을 떠서 인형놀이 하듯 입혀주거나 달아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한 소주회사의 두꺼비 캐릭터에 뜨개질 비키니 수영복을 입힌 작품을 업로드하거나, 인기 게임 ‘동물의 숲’에서 쓰이는 ‘무’ 아이템을 작게 제작해 올리며 호응을 얻었다. 홍씨는 “예전 뜨개인들은 정해진 도안을 보고 따라서 완성품을 그대로 만들어내기 위해 뜨개질을 했다”며 “하지만 요즘은 ‘이런 것까지 뜨개로 만든다고?’ 싶은 독특한 작품의 도안을 직접 제작하며 공유하는 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붕어빵 인형. 홍성애 제공

뜨개를 사랑하는 젊은 세대가 늘면서 대학가에서는 ‘뜨개 모임’이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화여대에서는 지난해 9월 ‘에에울’이라는 교내 뜨개 소모임이 만들어졌다. 현재 20명의 회원이 이 뜨개 소모임에 가입해 있는데, 시간이 맞는 사람들끼리 흩어졌다 모이며 교내에서 뜨개 모임을 진행한다. 창립된 시점부터 뜨개 소모임에 합류한 ‘뜨개 인생 3년차’ 고가현(22)씨는 “뭐든 뜻대로 쉽게 이뤄지는 게 없는 현실에서, 노력한 만큼 공들인 만큼 그대로 결과물이 나온다는 게 뜨개질에 푹 빠진 이유”라고 말했다. “공부든 취업 준비든 세상의 속도에 맞춰야만 하는 일이 참 많잖아요. 그런데 뜨개는 달라요.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나만의 속도대로, 내 뜨개바늘에만 집중하면 멋진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지난 10일 찾은 서울 서대문구 뜨개용품 전문점 ‘바늘이야기’의 매대 모습. 장선희 제공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에스엔에스를 중심으로 뜨개질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서 젊은 뜨개인들이 유입되자 뜨개 업계도 한층 젊은 감각으로 무장하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뜨개용품 전문점 ‘바늘이야기’에 들어서면 독특한 ‘뜨개 키트’ 진열대가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는다. 음식 재료를 모두 정량만큼 손질한 뒤 해먹기 편하도록 넣어둔 ‘밀키트’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늘부터 실, 도안까지 필요한 재료가 모두 담겨 있다. 에스엔에스 등을 통해 뜨개질을 처음 알게 된 뒤 직접 해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문의가 많아지며 최근에 새로 만든 공간이다. 동봉된 설명서의 정보무늬(큐알코드)만 찍으면 아무리 초보자라도 금세 멋진 작품을 하나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동영상으로 에이(A)부터 제트(Z)까지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지난 10일 찾은 서울 서대문구 뜨개용품 전문점 ‘바늘이야기’에서는 ‘밀키트’처럼 누구나 도전하기 쉬운 초보자용 뜨개용품을 판다. 장선희 제공

이 공간은 유튜브에서 ‘김대리’라는 닉네임으로 26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김아무개(29)씨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김씨는 4년 전부터 20여년 동안 뜨개 숍을 운영해온 어머니를 도와 업체 공식 에스엔에스 계정을 운영하며 젊은 뜨개인을 유입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김씨는 “귀엽고 예쁘면서도 개성 있는 것들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이 처음엔 어려웠지만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낀 뒤 뜨개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 같다”며 “예전에는 뜨개에 사용하는 실도 ‘여름에는 면, 겨울에는 울’처럼 공식화돼 있었지만, 요즘은 다양한 색상과 소재의 실을 사용하며 창의적으로 뜨개질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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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완성하면, 바로 다음 고민하는 세계

‘바늘이야기’를 운영하는 활동명 ‘김대리’가 주최한 ‘뜨개팅’ 현장 모습. ‘김대리’ 제공

김씨는 지난해 여름, 오프라인 뜨개 친구를 만드는 ‘뜨개팅’을 주최해 호응을 얻기도 했다. 뜨개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데이트 상대를 찾듯이 나와 취향이 맞는 뜨개 친구를 사귄다는 콘셉트로 연 모임이었다. 서로 마주 앉은 참가자 30여명이 ‘랜덤 데이트’를 하듯 돌아가면서 코바늘과 대바늘 중 어떤 뜨개 방식을 더 좋아하는지, 어떤 실을 선호하는지 서로의 뜨개 취향을 공유하며 친구를 만들었다. 오후 3시쯤 시작된 이날 모임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어 12월에는 ‘문어발 청산회’라는 재치 있는 모임도 열었다. 보통 뜨개질을 하다 보면 여러가지 작품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한번에 여러 주제의 책을 읽는 ‘병렬 독서’를 하듯, 뜨개질도 한번에 이것저것 ‘문어발’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미완의 상태로 멈춰 있는 작품들이 여러개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한 공간에 모여 무조건 다 완성하고 가자’는 취지로 만든 이 모임은 모집 공고를 올린 지 5분 만에 30명 정원이 찰 정도로 높은 호응을 얻었다. 김씨는 요즘에는 한달 동안 펜션에서 아예 모여 살며 종일 뜨개질을 하는 ‘뜨개 아티스트 레지던시’까지 모집하고 있다.

‘김대리’가 주최한 ‘문어발 청산회’ 모습. 문어발식으로 여러개의 뜨개질을 동시다발적으로 하고 있다. ‘김대리’ 제공

뜨개팅에 참여한 뒤 뜨개질에 더욱 재미를 붙였다는 대학생 배한별(22)씨는 “내향적인 성격이라 쉽게 사람들과 친해지기가 어려웠는데, 뜨개질이라는 취미를 도구 삼아 인간관계를 넓혀가는 방법도 배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배씨는 뜨개질이 ‘모든 잡념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을 가졌다고 덧붙였다. “뜨개바늘을 움직이다 보면 고민거리가 생각도 나지 않아요. 점점 난도가 높아지며 어려운 뜨개를 할 때는 도안을 새로 계산하며 떠야 하는데, 또 그럴 때는 어려운 문제를 풀듯 성취감도 느껴지고요. 한마디로 지친 몸과 마음의 힐링캠프 같은 취미죠.”

바늘에 실을 감고 빼는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온전히 바늘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다 보니,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예쁜 가방은 ‘덤’으로 따라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될까’ 싶었던 초보자의 의구심은 ‘진짜 되네?’ 하는 신기함으로 변했다. 낑낑대며 엮은 바닥판에 한줄 두줄 뜨개가 더해지자 얼추 파우치 모양이 완성됐다.

완성된 미니 파우치에 만족감을 느낀 것도 잠시, 바로 다음 작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근처 뜨개 숍에 들러 이번에는 대바늘과 실을 샀다. 바늘과 실을 고르는데, 공방에서 들은 박 원장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처음엔 손가락이 아프다, 뜻대로 안 된다면서 다시는 안 할 것처럼 하던 사람들도,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또 다음 뜨개질 거리를 고민하는 게 뜨개의 세계죠. 공방을 나가 뭐든지 빨리빨리 해내야 하는 정신없는 세상을 살다 보면 오롯이 내 손에만 집중해 뜨개질하던 그 순간이 다시 생각날 거예요.”

장선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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