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약혼에 격분해 귀를 자르다니”…정신병원에 갇혀 그림 그리던 남자의 반전 [나를 그린 화가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4. 8. 1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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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빈센트 반 고흐가 아닐까요.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과 ‘별이 빛나는 밤’ 등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정작 고흐가 살던 시기에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무관심했죠.

고흐는 요즘으로 치면 ‘N포 세대’의 전형이었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그는 결혼하지 못했고, 아이도 갖지 못했습니다. 친구도 많지 않았죠. 고흐의 그림은 돈이 되지 않아 그는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자신의 예술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고흐는 자주 상처받았습니다.

그래도 고흐는 밝고 따뜻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가 늙고 추해지고 고약해지고 병들고 가난해질수록, 나는 더 멋지게 구성된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로 보복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죠. 이번 연재에선 세상을 떠난 후에야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고흐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겠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이젤 앞에 선 자화상’, 1888
늦깎이 화가가 되다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고흐는 20대의 많은 세월을 적성을 찾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고흐는 프랑스 구필 화랑의 네덜란드 지사에 갤러리스트(갤러리 직원)로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영국 런던지점, 파리 본점에서도 일했죠. 이후 목사가 되기를 꿈꾸며 선교사로 일했지만 설교 기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면직됐습니다.

고흐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스로 늦었다고 생각했고,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고흐는 자신을 믿고 그림의 길에 들어섭니다.

당시 고흐에게 가장 영향을 준 화가는 장 프랑수아 밀레였습니다. 밀레는 시골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린 화가이죠. 고흐는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이 그림의 주된 소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농부들의 고단한 하루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협소한 집에 둘러앉아 가족들이 감자를 먹고 있습니다. 램프 불빛은 사람들의 여윈 얼굴과 뼈마디 굵은 손을 비춥니다. 고흐는 어둡고 얼룩덜룩한 색채로 이들의 가난한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모습 대신 농촌의 투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구두 한 켤레’, 1886
구두는 고흐가 즐겨 그렸던 소재입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고흐는 모델을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모델에게 비용을 줄 형편이 못 됐기 때문입니다. 고흐가 그린 구두는 노동자들의 작업화로 보입니다.
파리에서 색채를 받아들이다
고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그림을 그리다 1886년 프랑스 파리로 갑니다.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아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고흐는 인상주의 화풍을 일부 받아들였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그렸던 어두운 색채는 파리에 오면서 밝고 생동감 넘치고 선명하게 바뀌었습니다.

예술가 친구들도 사귀었습니다. 서른 세살의 고흐는 펠릭스 코르몽의 화실에서 수업을 들었는데요. 다른 학생들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았죠. 그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에밀 베르나르 등 화가와 우정을 쌓았습니다. (툴루즈 로트렉에 대한 기사는 ‘나를 그린 화가들’ 9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 1887~1888
화상인 탕기 영감은 파리의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페르(père·아버지)라고 불렸습니다. 탕기 영감은 가난한 화가들에게 외상으로 값싸게 재료를 팔았고, 돈을 빌려주거나 식사를 나눠줬죠.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탕기 영감은 조그만 전시실을 열어 고흐, 조르주 쇠라, 폴 고갱, 폴 세잔의 그림을 전시했습니다.

고흐에게 탕기 영감은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웃는 표정이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서 선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고흐는 탕기 영감이 좋아하던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묘사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일본풍: 꽃이 핀 자두나무’, 1887
당시 파리에서는 일본풍 회화가 유행했는데요. 고흐도 우키요에에 열광했습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일본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목판화를 모방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회색 펠트 모자를 한 자화상’, 1887~1886
고흐가 점묘파 기법을 독창적으로 적용한 자화상입니다. 고흐는 짧은 선을 긋는 방식으로 대담한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배경에는 파란색과 주황색을, 수염과 눈에는 빨간색과 녹색을 사용하는 등 보색을 나란히 배치했습니다.

아무리 돈독한 형제여도 같이 살면 부딪칠 수밖에 없죠. 한 아파트에서 살던 고흐와 테오의 관계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또 고흐는 테오로부터 생활비를 받아 썼는데, 파리는 돈이 많이 들었죠. 파리에 싫증이 난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로 이동했습니다.

아를에 가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
남쪽에 있는 아를은 고흐가 찾던 곳이었습니다. 따사로운 햇볕과 화사한 풍경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고흐는 아를에 있는 ‘노란 집’에서 살았습니다. 버터 빛 같은 노란 페인트칠이 된 곳이었죠. 이 그림은 노란색과 하늘의 강렬한 푸른색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침실’, 1889
고흐가 지냈던 침실입니다. 밝은색이 주를 이룹니다. 고흐는 방의 모습을 단순하게 묘사해서 휴식과 수면의 분위기를 내려고 했습니다. 고흐의 방은 단출합니다. 침대와 책상, 의자는 장식 없이 단순합니다. 그림 몇 점과 옷가지가 걸려 있죠. 소박하지만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꽃병에 꽂힌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 1888
아를에 있는 동안 고흐는 해바라기를 소재로 열 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흐는 고갱의 방을 해바라기 그림으로 꾸몄죠.

배경은 넓은 붓질이 돼 있어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반면 고흐는 꽃을 조금 다르게 그렸습니다. 꽃잎과 잎의 방향에 따라 자유롭게 붓을 놀렸습니다. 개성과 역동성이 엿보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조제프 룰랭의 초상’, 1888
우체국 직원이었던 조제프 룰랭은 고흐의 좋은 친구였습니다. 룰랭은 고흐가 귀를 자른 후 날마다 문병을 와줬고, 퇴원하는 고흐를 집까지 바래다줬습니다. 고흐는 룰랭의 초상화를 여러 번 그렸고, 룰랭 가족들의 그림도 그려서 선물로 줬죠.

룰랭의 키는 2m에 가까웠다고 해요. 앉아있는 자세에서도 룰랭의 체격이 느껴집니다.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지 않나요? 고흐와 술을 마시다가 급하게 모델을 선 모습이 상상됩니다.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밤의 카페 테라스 풍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어두운 하늘이 불빛을 밝힌 노란색 카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흐는 관람자의 시선이 노란빛의 카페에 쏠리게 했습니다. 테라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밤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고갱과의 생활
고흐는 아를에 있을 때 고갱을 초대했습니다. 고흐는 아를에서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동료 예술가와 함께 지내면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고, 생활비도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고갱은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작품 거래상인 테오의 권유를 받고 아를로 갔습니다. 테오는 고갱을 설득하며 그의 빚을 다 갚아줬습니다.

고갱과 지내면서 고흐는 자신과 고갱의 의자를 그렸습니다. 인물이 앉아 있지는 않지만, 이 의자들은 고흐와 고갱의 성격을 보여줘 ‘얼굴 없는 초상화’의 역할을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고갱의 의자’, 1888
고갱의 의자는 나무로 된 안락의자입니다. 의자의 붉은 갈색과 배경의 녹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가스등이 의자를 비추고 있죠. 촛불과 두 권의 소설책이 놓여 있어 고갱의 지적인 면을 부각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의 의자’, 1888
고흐의 의자는 밀짚으로 돼 더 단순합니다. 그 위에 파이프와 담배 주머니가 놓여 있습니다. 고갱의 의자보다는 소박하고 겸손한 느낌이 나죠. 의자 왼쪽 뒤편에는 고흐의 이름이 쓰여 있는 양파 상자가 있습니다.

고흐와 고갱의 생활은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함께 많은 주제를 연구했고, 서로의 작품을 비교하고 예술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하지만 고갱이 아를에 온 지 9주가 지났을 무렵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였는데요. 고갱은 고흐를 내버려 둔 채 노란 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고갱의 회상에 따르면 고흐는 그날 고갱을 면도칼로 위협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잘라낸 귀를 매춘부에게 전해줬다고 알려졌죠. 한편 고흐가 귀 전체가 아닌 귓불을 잘랐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고흐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고흐는 동생 테오로부터 약혼을 알리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고 재정적인 도움을 주던 유일한 상대인 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고흐가 공황 상태였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89
고흐는 귀에 붕대를 감은 자기 모습을 그렸습니다. 온전한 한쪽 귀를 그릴 수도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자신이 자른 귀를 그렸죠. 굳은 표정에서 슬픔이 느껴집니다. 고흐는 커다란 붕대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벽에 걸려 있는 우키요에의 화려한 채색은 붕대의 흰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룹니다.
제 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가다
귀를 자른 후 고흐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퇴원하고 노란 집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주민들의 반발이 일었습니다. 아를 시민들은 고흐를 구금하라는 탄원서를 냈습니다. 결국 고흐는 자기 발로 다시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아를에서 북동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생폴드모졸의 정신병원에서 고흐는 빈 병실 하나를 작업실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온종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 밤하늘은 소용돌이치고 있고, 초승달과 별이 진동하듯 빛을 내고 있습니다.

마을 안에는 우뚝 솟은 교회가 있습니다. 주택들은 불을 환히 밝히고 있죠. 병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가족들이 함께 사는 이 집들은 아늑해 보였을 것입니다.

앞쪽 왼편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풍경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밤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듯 역동적으로 솟아올라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1889
고흐가 사용하던 모티브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작품입니다. 익은 밀이 금빛 띠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홍색 양귀비꽃 몇 송이가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죠. 오른쪽에는 사이프러스 나무 한 쌍이 있습니다. 일렁이는 구름은 따뜻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과 이 작품을 비롯해 세 점을 단 일주일 만에 그렸습니다. 병약한 상태였지만 전성기를 구가한 셈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팔레트를 든 자화상’, 1889
안타깝게도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몇 번 평정을 잃었습니다. 1년 동안 그는 네 차례 발작했습니다. 이 자화상은 고흐가 물감을 삼켜 음독자살을 시도한 뒤 깨어나서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준비할 때 고흐는 테오에게 “나는 악마처럼 야위었고 창백했다”는 편지를 보냈죠. 고흐의 두 눈은 쓸쓸하면서도 슬퍼 보입니다. 뺨은 홀쭉해져 야윈 모습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9
고흐는 소용돌이치는 배경에 자신을 그렸습니다. 이 배경이 고흐의 불안하고 신경증적인 감정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죠. 고흐는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눈빛은 단호해 보입니다. 정신병원 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공동 작가, 테오
빈센트 반 고흐, ‘테오 반 고흐의 초상’ 또는 ‘자화상’, 1887
동생 테오는 고흐가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테오는 1880년부터 형을 부양했습니다. 캔버스와 물감, 종이와 붓은 물론 식비와 셋집을 구할 돈도 보냈습니다.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주는 동생에게 고흐는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고흐는 테오에게 “그림을 그리느라 너에게 너무 신세를 졌다는 채무감과 무력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어”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죠.

그런 고흐를 테오는 항상 지지해줬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과 ‘해바라기’를 비롯한 고흐의 그림에 대해 “정말 훌륭하다”며 “언젠가는 분명 큰 평가를 받게 될 거야”라고 응원했습니다. 또 미술계가 빠르게 변해간다는 걸 알리며 “지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그 인기를 영원히 누리지 못할 거야. 우리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걸 기뻐해야 하는지도 몰라”라고 했죠.

고흐는 테오를 그림의 공동 작가라고 여겼습니다. 자기 작품에 대해 “‘우리가’ 그림을 그렸다”고 표현했고 “내 작품에 무언가 좋은 점이 있다면, 그 중 절반은 네가 한 것이라고 생각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고흐가 정신병원에서 지내던 마지막 달, 고흐는 테오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테오와 그의 부인 요안나는 삼촌의 이름을 따 아기의 이름을 빈센트로 지었죠. 고흐는 자신처럼 불행한 삶을 살면 안 된다고 처음에 그 이름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아이가 고흐와 같이 참을성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염원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꽃 핀 아몬드 나무’, 1890
이 그림은 고흐가 조카 빈센트를 위해 그린 그림입니다. 침실에 걸어두라고 선물했죠. 삼촌으로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꽃이 핀 가지가 뻗어 있습니다. 꽃나무를 그린 모습에 동양적인 화풍이 묻어납니다. 평소 고흐는 거친 붓질을 했지만, 이 그림에서 만큼은 배경을 차분하게 묘사했습니다. 고흐는 당시 꽃 핀 나뭇가지 그림 중 이 그림에 가장 공을 들였다고 밝혔습니다.

마침내 평온에 이르다
약 1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고흐는 퇴원 후 오베르 쉬르 와즈라는 지역으로 갔습니다. 이곳에서 고흐는 밀밭을 즐겨 그렸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비 온 뒤의 밀밭’, 1890
‘비 온 뒤의 밀밭’은 밝은 파스텔 톤 색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넓은 밀밭을 부드러운 노란색과 연한 초록색, 은은한 자주색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늘은 솜털 같은 구름으로 활기를 띱니다.

고흐의 삶은 순조롭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37세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1890년 7월 2일 고흐는 자신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총알이 고흐의 가슴에 박혔는데, 안전하게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죠. 이로부터 이틀 후 고흐는 숨을 거둡니다. 테오의 말처럼 고흐는 세상에서 한 번도 누리지 못한 평온을 그제야 찾았습니다.

다만 고흐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고흐가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고 동네 불량 청소년들이 쏜 총에 맞았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흐는 그림 도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총에 맞은 후 불량배들이 그림 도구를 훔쳐 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를 꽂은 꽃병’, 1889
고흐는 세상과 삶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돌려받지는 못했습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선 “우리는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을 한탄했죠.

그래도 고흐는 현실의 고통에 굴복하거나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지내면서도 그림에 몰두하며 자신의 기량을 끌어올렸습니다.

고흐는 불행했다고 여겨지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희망을 느낍니다. 이는 고흐가 자기 삶을 사랑했기 때문 아닐까요.

고흐는 테오에게 “나는 종종 내가 부자라고 생각한단다”라며 그 이유로 “작품 속에서 내가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할 수 있는 것, 나에게 영감을 주고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고흐는 온 힘을 다해 예술에 몰두했습니다. 작품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았고, 용기 있게 자기의 길을 갔죠. 이번 주말에는 고흐의 작품을 찬찬히 감상하며 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참고 자료>

-EBS, 클래스ⓔ ‘이동섭의 반고흐 인생수업’

-마틴 베일리(2021),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화가, 그 창작의 산실을 찾아서, 부커스

-빈센트 반 고흐; 신성림 옮기고 엮음(2017),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위즈덤하우스

-페데리카 아르미랄리오·줄리오 카를로 아르간(2007), 반 고흐, 예경

-이자벨 쿨(2007), I, Van Gogh, 예경

-인고 발터(2005), 빈센트 반 고흐,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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