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의 공포, 그 이면에 숨겨진 윤리적 질문들
20세기 폭스사의 에이리언 vs.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1978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에이리언>은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공포영화 가능성을 열어젖히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했다. 첫 번째 작품의 흥행 성공과 평단의 호평 이후 리들리 스콧 감독은 후속작 연출을 적극적으로 희망했으나 판권을 쥐고 있던 20세기 폭스사에 의해 밀려나야 했고 <에이리언2>(1987)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에 의해 만들어져 전편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다. 두 편의 성공 이후 에이리언 시리즈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에이리언 3>(1992),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에이리언 4>(1998)을 거치며 명실공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영화로 거듭났다. 감독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에 의해 뒤로 밀려나야 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은 결국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다시 의기투합하여 <프로메테우스>(2012)를 기획한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카메론 감독과 결별하고 본인이 직접 제작과 감독을 맡으며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까지 완성한다.
20세기 폭스사의 에이리언 시리즈는 모든 음모의 중심에 웨이랜드 유타니 주식회사를 둔다. 이 회사를 무적의 외계 생명체를 활용해 가공할 무기를 만들려는 음모의 주동자로 삼는다. 대자본에 의해 제작된 콘텐츠가 대자본을 비판하는 역설은 다수의 영화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폭스사의 에이리언 시리즈는 자본에 대한 비판보다 새로운 강인한 여성성을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더 큰 가치를 부여받아 왔다. 남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제노모프'(<에이리언 2>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로 사람을 숙주로 태어난 에이리언이 허물을 벗고 성장한 상태를 일걷는다)의 긴 머리 형태는 남성 폭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에이리언과 맞서 싸우는 리플리(시고니 위버)의 강인함을 더욱 부각한다. 2편의 에이리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베트콩의 상징으로 해석되고, 개의 몸을 통해 탄생한 3편의 에이리언은 동물실험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재해석되는 등 에이리언 시리즈는 매 작품마다 새로운 의미를 양산하고 있다. 제노모프의 기괴한 신체에 기입된 상징적 의미들이야말로 20세기 폭스사가 주도한 에이리언 시리즈의 성공 이유다.
하지만 점차 리들리 스콧 감독은 제노모프에만 열광하는 기존의 시리즈물과 선을 긋고 보다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을 심어 넣는다.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왜 생겨났을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대자본을 등에 업은 웨이랜드 유타니의 대표, 피터(가이 피어스)와 엘리자베스 쇼 박사(누미 라파스)가 주도하는 이 질문들은 마치 신들의 불을 훔치려 했던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을 창조한 엔지니어들의 비밀을 탐한다. 그 대가는 프로메테우스가 영원한 형벌을 받은 것처럼 에이리언에 의해 모조리 살육당하는 지옥으로 펼쳐진다.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에이리언은 금단의 영역을 욕망한 자들이 반드시 만나야 하는 악의 존재와 다름없다. 피터의 영생을 향한 욕망과 엘리자베스의 인간 탄생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 그리고 창조하는 인간이 되고 싶었던 인조인간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의 야욕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인 것이다.
극사실주의 스페이스 오페라 공포, <에이리언: 로물루스>
2024년 8월 14일에 개봉한 에이리언 시리즈의 신작 <에이리언: 로물루스>(이하 <로물루스>)는 20세기 폭스사의 에이리언 시리즈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 시리즈를 모두 적절히 결합한다. 시간 순서 상으로는 <에이리언 1>이 벌어진 2122년으로부터 20년 후인 2142년을 배경으로 다루어 20세기 폭스사의 초기 에이리언 시리즈 사이에 위치한다. <로물루스>는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은 정당한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전면에 내세우며 20세기 폭스사가 주도했던 대자본의 합리성, 리들리 스콧 감독이 주도했던 인간 존재론적 사유를 극한의 딜레마로 새롭게 제시한다. <로물루스>의 세계는 전편보다 더 가혹하고 잔인해져 있다. 조금이라도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맹목적인 서사의 속도감은 웨이랜드 유타니가 이끄는 노동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젊은 청년들의 욕망을 핵심 원료로 삼는다. 이는 전적으로 20세기 폭스사가 주도했던 세계관이다. 하지만 그들의 탈주를 막아서는 에이리언의 뿌리는 리들리 스콧의 세계관에 있다. 스콧 감독이 펼친 에이리언 탄생의 역사가 MZ 세대의 희망을 짓밟고 고통의 비명을 재료 삼아 자본주의를 더욱 가속화하는 형국이다. 이보다 더 잔인한 지옥도가 또 있을까 싶다. 하지만 공포 장르는 애초부터 현실의 모순을 통해서 집단 무의식에 잠재된 공포심을 이끌어 내는 장르가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로물루스>는 지극히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스페이스 오페라 공포 영화임에 분명하다.
<로물루스>의 서사는 주인공 레인(케일리 스패니)이 이끌지만 작품의 메시지는 인조인간 앤디(데이비드 존슨)가 이끈다. 앤디에게는 이전 작품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과거 인조인간들의 DNA가 심겨 있다. 리들리 스콧이 창조한 데이빗(마이클 패스빈더)은 인간의 창조성을 훔치려 했던 괴물이었다. 그는 인간을 재물 삼아 에이리언을 창조하여 새로운 생명 질서를 주도한다. 피터가 영생(생명 연장)을 욕망한 것처럼 그가 창조한 데이빗은 생명 창조를 욕망한다. 인간의 결핍된 욕망을 욕망하는 인조인간 데이빗은 20세기 폭스사가 만든 애쉬(이안 홈), 비숍(랜스 헨릭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존재다. 애쉬와 비숍은 철저히 대자본의 욕망을 대리한다. 리플리와 대립했던 애쉬도, 그녀와 협력했던 비숍도 웨이랜드 유타니가 주입한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회사의 이익을 대변한다. 반면 데이빗은 대자본의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자본가 피터의 욕망을 대리한다. 데이빗의 생명 창조 욕망은 자본이 가능케 한 무소불위 권력으로부터 잉태된 결과다. 신의 영역을 탐하겠다는 오만함은 자신이 모든 걸 다 소유했다는 인간의 교만으로부터 출발한다. 자본과 권력의 극단적 팽창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영생을 욕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인조인간에 기입된 윤리적 질문
<로물루스>의 앤디(데이비드 존슨)는 리들리 스콧의 데이빗과 20세기 폭스사의 애쉬/비숍을 모두 이식받는다. 앤디는 극적인 사건 속에서 두 개의 자아를 지닌다. 자신을 친동생처럼 여기는 레인(케일리 스패니)의 적극적인 보호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자아. 그리고 웨이랜드의 과학자로서 회사의 이익을 적극 대표하는 자아. 두 자아의 분열 속에서 <로물루스>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윤리적인가 질문한다. 전자에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비숍의 인격이 부여되어 있다. 모두가 합성인간(Synthetic)이라 부르지만 자신을 인조인간(Artificial Person)이라 불러달라 당당히 요구하는 앤디의 모습은 <에이리언 2>에서 비숍이 보여준 태도와 동일하다. 반면 회사의 이익을 적극 대표하는 앤디는 망가져 버린 애쉬의 칩을 이식함으로써 탄생한다. 칩에는 에이리언 연구 성과를 반드시 회사에 전달해야 한다는 미션이 담겨 있다. 그 미션은 20세기 폭스사가 주도했던 (에이리언을 무기화하려는) 웨이랜드의 미션이 아닌 스콧 감독이 그려낸 피터의 야욕에 더 가깝다. 에이리언을 연구하여 얻어낸 신물질을 통해 새로운 종으로의 진화를 계획하는 웨이랜드의 욕망은 인간이 신의 능력을 취하려는 도전이다. 그 결과 탄생한 <로물루스>의 신종 제노모프는 <에이리언 2>의 퀸 에이리언이 던져준 충격 그 이상의 공포를 전달한다.
<로물루스>가 앤디를 통해서 던진 윤리적 질문은 최근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제기되는 질문, ‘과연 인공지능은 인간의 능력을 어디까지 취할 것인가?’와 구분되어 제시된다. <로물루스>의 관심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이 아니다. 이미 <로물루스>의 세계는 인공지능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는 세계, 그들이 친구이자 가족인 세계, 그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맡겨야 하는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 취할 수 있는 질문은 '과연 인공지능이 내리는 선택과 행동은 윤리적일 수 있을까?'로 향한다. 대자본의 프로그램을 이식한 인공지능에게 인간은 상품 생산의 한 부속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철저히 이성적 판단 속에서 행동하는 인조인간의 합리적 선택은 이전의 에이리언 시리즈가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존엄을 배반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조인간의 이성적 합리성은 이전 시리즈에서도 단지 인조인간만의 것이 아니었다. <에이리언 1>에서 리플리는 페이스 허거에게 붙잡힌 동료를 검역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주선에 들이려 하지 않는다. <커버넌트>에서도 미지의 물질에 감염된 탐험대원을 격리한다는 이유로 패리스(에이미 세이메츠)는 카린(카르멘 에조고)을 에이리언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창조한 엔지니어들까지 말살시키며 자신이 신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데이빗의 욕망은 대자본을 통해 영생을 탐했던 피터의 욕망이다. 인조인간들의 잔인하고 냉정한 행동에는 자본과 과학의 합리성을 통해서 세상을 지배하려 한 인간의 모순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로물루스>가 던진 질문은 스스로 사고하는 인공지능의 윤리성이 과연 인간의 윤리성과 구별될 수 있는가에 있다. 대자본에 기입된 인간의 욕망이 기술집약적인 인공지능을 탄생시켰다면 그 기술에는 이미 인간의 탐욕이 심겨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윤리성에 대한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질문해야 한다. 그 풍경은 에이리언 시리즈가 거듭해서 재현한 유혈이 낭자하는 참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아닌가?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개척해 나갈 자유의지를 지녔음을 <로물루스>의 극한의 공포 속에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동윤 영화평론가(dongyunlee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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