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비아의 압도적 대자연…인간의 불편은 사소한 일이었다 [ESC]
사막에 우뚝 바위산, 스피츠코프
부시맨이 그린 기린, 누 암벽화
야생동물 즐비 에토샤 국립공원
지구의 아름다운 존재들에 감동
“내가 어렸을 때는 여기가 나의 놀이터였어. 어른이 된 지금은 이곳이 나의 직장이야. 몇 년 후 너희가 다시 왔을 때 내가 없을 수도 있겠지. 그럼 내 몸은 저 하늘에 있겠지만 내 영혼은 이곳에서 여길 지키고 있을 거야. 여기가 나의 집이야. 아침마다 눈을 뜨면 나는 신에게 기도하곤 해. 오늘도 태양이 떴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을 감사드리지.”
다마라 부족민 프란스의 이야기는 한 편의 시 같았다. 그가 느끼는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광막한 사막에 우뚝 솟은 기묘한 형상의 바위 봉우리는 장엄한 아름다움에 고요히 잠겨 있었다. 사람의 손이 훼손하지 못한, 어떤 원시의 힘이 전해지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나미비아의 마터호른’이라 불리는 스피츠코프에 있었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배경이 된 이곳은 700만 년 전에 형성된 화강암 바위군이 모여있다.
흙먼지 날리는 평원 위에 1784m 높이로 우뚝 솟은 바위산은 시선을 압도한다. 캠핑장은 다마라 부족이 공동으로 꾸리는 곳이었다. 온수 샤워는 입구에서만 가능하고, 캠프 사이트에는 수도도, 전기도 없다. 인터넷은 당연히 안 터진다. 경이로운 주변 환경은 그 모든 불편함을 사소하게 만들었다. 캠프 사이트 사이의 거리는 인간이 그리워질 만큼 아득히 멀었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큰 바위에 올라가 서편 하늘로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멀찍이 떨어진 캠프 사이트 덕분에 보이지 않던 이들이 여기서도 멀찍이 떨어져 앉아 해 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보라, 핑크, 오렌지색으로 변해가는 하늘 아래 거대한 화강암 봉우리들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가 먹빛에 잠겨갔다. 빛이 사라진 공간을 별무리가 빼곡히 채우기 시작했다. 캠프장에 완벽한 고요와 평화가 내려앉고 있었다.
숙소 정원 넓이가 1500만평
우리가 꿈꾸었던 캠핑의 낭만을 드디어 실현하는 중이었다. 여유 있게 캠핑장에 도착해 뜸 드는 구수한 내음에 코를 벌름거리며 밥을 지어 먹고, 타닥타닥 장작 타오르는 소리에 귀를 열어둔 채 사금파리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저녁 식사 전에는 캠핑장 안의 로컬 가이드를 섭외해서 부시맨들이 남긴 수천 년 된 암벽화를 보러 다녔다. 나미비아 최초의 예술가는 바위에 그림을 그리고 칠을 한 부시맨들이었다. ‘부시맨의 파라다이스’로 불리는 동굴에는 기린, 누, 하마, 자칼, 코뿔소가 그려져 있었다. 오랜 가뭄으로 인해 북쪽으로 올라가 버린 동물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바위에 앉아 해 뜨는 모습을 지켜본 후 다시 프란스와 만나 야생 동물을 찾아 나섰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땅은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공기 속에 잘 마른 건초 같은 냄새가 희미하게 퍼져있었다. 두 시간 남짓 기다린 끝에 우리가 본 건 얼룩말 한 마리뿐.
동물을 찾아 우리도 북으로, 북으로. 에토샤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간만에 차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가벼웠다. 전날 차 수리를 받은 스바코프문트는 한때 나미비아를 점령했던 독일의 분위기가 강하게 남은 항구 도시였다. 독일은 뒤늦게 아프리카 영토 침략에 뛰어들어 1884년부터 1915년까지 나미비아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원주민들의 토지와 가축을 약탈하며 잔혹 행위를 벌이다 그에 반발해 봉기한 헤레로와 나마 부족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학살했다. 1904년부터 1907년 사이 인구 8만5000명의 헤레로족은 80%가 몰살당해 1만5000명만 살아남았고, 나마족은 절반이 몰살당했다. 유엔은 이 사건을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비극에도 경중이 있는 걸까. 나미비아에 오기 전에는 이런 학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니. 독일은 지난 2021년, 6년 간의 과거사 협상 끝에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다. 그 대가로 독일이 30년간 제공하기로 한 11억유로(약 1조6400억원)는 지금 나미비아의 친환경 수소 에너지 사업의 재원이 되고 있다. 식민 통치는 끝났지만 이 나라의 경제권은 인구 1%도 안 되는 독일계 나미비아인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 특히나 여행사와 호텔 같은 관광 산업은 대부분 그들 차지. 우리가 빌린 차량도, 우리가 머무는 대부분의 호텔도 독일 문화를 열렬하게 지켜온 이들이 소유한 터라 내내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독일인의 카센터에서 차량 수리도 마친 후라 안심하고 카만얍을 향해 달렸다.
카만얍의 숙소는 정원의 넓이가 무려 1500만평. 숙소 게이트를 통과하고도 리셉션까지 8㎞를 더 가야 했다. 드넓은 정원에 자리한 숙소는 평화롭고 아름다워 마음이 설렜지만 기쁨은 찰나. 차 트렁크를 열던 미옥샘의 떨리는 목소리. “문이 안 열린다. 미치겠네.” 열쇠 구멍에 열쇠가 꽂히지 않는 상황은 또 처음. 게다가 조리도구 상자를 넣고 빼는 레일의 레버도 작동을 멈춘 상태. 눈앞이 어둑해졌다. 우리끼리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결국 긴급구조를 요청했다. 리셉션의 친절한 직원 루디가 열쇠 구멍으로 숨을 몇 번 불어넣어 먼지를 빼내더니 열쇠 해결. 레일의 레버는 튀어나온 부분을 손으로 쓱 밀어 넣더니 또 해결. 덕분에 1500만평 정원의 일부를 산책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드디어 에토샤 국립공원으로 들어섰다. 나미비아에서 가장 오고 싶었던, 야생 동물의 천국. 이 국립공원에는 흰코뿔소 같은 멸종 위기종을 포함한 다양한 야생 동물이 거주한다. 우주에서도 보일 정도의 거대한 소금 평원이 이 국립공원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밀렵은 여전히 아프리카 야생 동물의 가장 큰 위협인데 2022년에만 밀렵으로 87마리의 코뿔소가 살해당했다. 그중 46마리가 에토샤의 코뿔소들이었다. 코뿔소 뿔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그릇된 믿음 때문인데 대부분의 소비자는 중국, 홍콩, 싱가포르의 부자들. 이런 한심한 소비는 언제쯤 사라질까.
얼룩말 사냥 나선 사자 부부
우리는 새벽의 ‘모닝 게임 드라이브’를 신청했다. 게임 드라이브. 야생 동물을 찾아다니는 활동을 이르는 말이다. 그 옛날 백인들이 총 들고 다니며 게임 하듯 야생 동물을 쏘아죽이던 데서 유래했다. 나는 이 잔혹한 말보다는 스와힐리어로 ‘여행’을 뜻하는 사파리가 더 와닿는다. 아직 여명도 밝지 않은 6시, 가이드와 함께 야생 동물을 찾아 나섰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새끼 사자 2마리를 포함한 9마리의 사자 무리가 물가에서 노는 모습이었다. 나무 사이로 비쳐든 아침 햇살이 초원에 황금빛을 뿌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기 사자 두 마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그 평화로운 초원에 긴장이 찾아온 건 암사자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였다. 사자 부부가 얼룩말 사냥에 나섰다. 워터홀로 물을 마시러 가던 얼룩말 무리가 암사자의 모습을 포착했는지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암사자가 얼룩말을 유인해 숫사자가 있는 곳으로 몰고 가려던 전략은 무참히 실패. 암사자는 터덜터덜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얼룩말들은 다시 물웅덩이를 향해 걸어갔다. 실패는 도전의 열매라고 했던가. 사냥에 실패하는 사자의 모습에 골치 아픈 일에 계속 휘말리는 어설픈 우리가 겹쳐졌다. 세상은 성공, 완성 같은 단어로 이뤄진 게 아니라 실패, 미숙함, 불완전함, 이런 단어들로 구성되어 돌아가는 게 아닐까. 어쩐지 위로가 되는 아침이었다.
20년 전, 나의 첫 사파리는 탄자니아의 세렝게티였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말의 탄생지와도 같은 곳에서 나는 이 단어들로 세상을 설명하는 데 의문을 품게 되었다. 내가 마주친 두 장면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사자의 사냥 장면이었다. 어디선가 사자가 나타나면 모든 사파리 차량이 일제히 그곳으로 달려가 교통체증을 이루며 사자를 지켜봤다. 4박5일 동안 사자가 사냥에 성공하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다. 사자는 백전백패하고 있었다. 사자에게 날카로운 어금니와 용맹함이 있다면 톰슨가젤이나 임팔라, 얼룩말에게는 빠른 발이나 빼어난 시력이 있기 때문. 사자가 얼룩말이나 임팔라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끝없이 도전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저마다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지니고 태어나는구나. 강자에게 먹히는 운명으로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가젤과 임팔라가 알려줬다.
세렝게티에서 내 편견을 깨놓은 두 번째 장면의 주인공은 얼룩말과 누. 건기가 되면 풀과 물을 찾아 20만 마리의 얼룩말과 150만 마리의 누가 함께 이동을 한다. 누는 청력과 후각이 발달해 십수㎞ 떨어진 거리의 물냄새와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포식자의 냄새를 잘 맡을 수 있고, 얼룩말은 시각이 뛰어나 멀리 있는 포식자를 구별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서로의 약함에 기대어 함께 생존해 간다. 약점은 드러내서는 안 되는 거고, 타인을 짓밟아서라도 생존해야만 한다고 믿는 인간의 세계가 동물의 왕국보다 더 잔혹한 것 같았다. 겸손하게 살자, 더불어 살아가자, 어려울 때는 도움을 요청하자. 내 삶의 기본 태도를 나는 이 말하지 못하는 생명들에게서 배웠다. 그들은 사람과 함께 지구를 아름답게 만드는 존재인 동시에, 사람과 더불어 이 행성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권리를 지닌 생명이기도 하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묻게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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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내 멸종 예상되는 코끼리들
사자 가족을 만났던 날 저녁, 우리는 기척을 숨기고 앉아 기다렸다. 국립공원 바깥 물 웅덩이로 찾아오는 동물을. 물을 마시러 온 코뿔소 2마리가 갑자기 달아나는가 싶었는데, 멀리서 흙먼지가 날리고,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물가의 새들이 홰를 치며 날아오르고, 자욱한 먼지 사이로 코끼리 무리가 코를 흔들며 길게 울었다. 20마리 남짓한 코끼리들의 물 마시는 소리와 새들의 날갯짓 소리 너머로 지는 해의 꼬리가 붉게 타올랐다. 동물계 영장목 사람과의 인간이 동물계 장비목 코끼리과의 아프리카코끼리떼와 평화롭게 공존했던 찰나의 시간.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음이 그저 감사했다. 오래 전에 따먹은 과일 나무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죽은 동족의 뼈무덤에 조의를 표하며, 무리가 둥글게 몸을 모아 보초를 서서 어린 새끼를 지키며 군집 생활을 하는 코끼리. 코끼리과의 동료들 중 유일하게 아프리카속코끼리와 아시아속코끼리만 살아남았지만, 지금과 같은 상아 선호도가 계속되는 한 수십 년 이내 멸종이 예상되는 코끼리들. 인간은 끝내 그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다음날 저녁에는 기린 떼와 마주쳤다. 물을 마시러 온 14마리의 기린과 그 기린을 노리는 건너편의 사자 2마리, 얼룩말 5마리와 코끼리 1마리. 저무는 태양 아래 사자를 경계하며 마른 목을 축이던 기린이 조심조심 앞다리를 뻗어 몸을 낮추던 모습은 우아했다. 차량에 생긴 문제를 물어봤다가 말을 트게 된 국립공원 직원 크리스토퍼가 기린이 물을 마시러 오는 워터홀로 데려다준 덕분에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우리의 말썽쟁이 차는 여전히 문제투성이였다. 그가 차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문제가 있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야.” 그래, 차와 텐트에 매일 난타당하면서도 매 순간 감동하고, 신나게 웃는 이 언니들이 있는데 그까짓 문제쯤이야! 작동하지 않는 레일에 침낭을 끼워 넣고 우리는 631㎞, 이번 여행에서 가장 먼 거리를 달렸다. 오카방고 강변까지 10시간을 꼬박 도로에서 보낸 저녁, 강변의 숙소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근사했다. 우리는 다음날 보츠와나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보츠와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면 차를 돌렸겠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설렘으로 그저 행복했다.
글·사진 김남희│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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