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뜻대로 되진 않는 삶…‘받아들이는 지혜’가 중요해
수용의 기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건 진리
오히려 좋아…정약용의 전화위복
문제를 푼다…내 삶의 주인공은 나
내가 연출자…멋지게 파도 타는 법
지난 한달은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밤사이 최저 기온이 25도를 웃돌았지요. 잘 지내셨나요, 여러분. 조민진입니다. 폭염을 피해 저는 서점에 들르곤 했습니다. 흐르는 땀을 식히고 처진 기분을 고양하기에 서점만큼 좋은 곳도 많지 않다고 여기거든요. 최근엔 잡지 코너를 둘러보다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을 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피격 사진이 표지였지요. 하지만 정작 저를 상념에 잠기게 한 건 ‘바이든 기사’였습니다. 대선 후보직을 사퇴한 조 바이든 대통령에 관한 글이었죠. 트럼프와의 텔레비전 토론 뒤 고령 논란에 휩싸이면서 결국 후보직에서 물러나게 된 바이든을 설명하는 대목이 이랬습니다. “바이든은 가고 싶지 않았다.”(Biden did not want to go.) 들끓는 여론을 수용해 결국 사퇴했지만 사실 그는 재선 도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요. 정치 인생 50년 끝에 마침내 얻었던 대통령직을 내려놓기로 한 결정이 쉬웠을 리 없다는 해석에 공감했습니다.
쓴맛도 삼켜야 하는 애잔함
바이든 대통령은 81살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지요. 하지만 연륜이 깊어도 자신의 기대와 다른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는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어쩐지 처연한 마음이 들더군요. 어느 인생에서나 궁극적 과제는 결국 ‘수용하기’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는 일 말입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에선 왠지 애잔함이 느껴집니다. ‘늙음을 받아들이다’, ‘실패를 받아들이다’, ‘고통을 받아들이다’ 식으로 짝을 이룬 표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데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지요. 반대로 ‘젊음을 받아들이다’, ‘성공을 받아들이다’, ‘쾌락을 받아들이다’와 같은 표현은 다소 어색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그 대상은 보통 괴로운 감정을 동반할 때가 많지 않던가요? 삶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만 주진 않습니다. 좋지 않은 것도 줍니다. 늙음이나 실패나 고통 따위는 굳이 원할 이유가 없지만 살면서 겪게 되는 것들이지요. 삶에는 덜 좋은 것들도 포함돼 있음을 살면서 알게 됩니다. 그러니 저항하기보다는 수용하는 자세도 필요함을 차츰 깨닫게 되지요. 이번 글의 화두는 ‘수용의 기술’입니다. 어떻게 하면 어렵고 힘든 상황조차 지혜롭게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 있는지를 나눠보겠습니다.
먼저 ‘오히려 좋아’ 자세입니다.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안 좋은 상황에서도 좋은 점을 찾으면서 흔쾌히 받아들이는 겁니다. 얼핏 자기합리화나 정신승리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을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밝은 면에 초점을 맞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면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을 떠올려보겠습니다. 75살에 숨진 정약용이 평생 쓴 책은 500여 권에 이릅니다. 주요 저서 대부분을 유배 기간에 썼지요. 지방관의 역할을 밝힌 대표작 ‘목민심서’도 유배 마지막 해에 지었습니다. 그때가 1818년, 그의 나이 57살이었습니다. 정약용은 1801년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 때 모함을 받아 전남 강진으로 유배된 뒤로 장장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기간을 자기 수양과 학문 정진의 기회로 삼았지요. 어차피 폐족 신세이니 출세를 신경 쓸 이유도 없고 오히려 잘됐다, 이제야말로 나를 위한 참된 공부를 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아들에게도 “(폐족이라서) 과거 공부에 대해선 근심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며 “참으로 독서할 수 있는 때를 만났다”(정약용 산문 선집 ‘다산의 마음’)고 독려했습니다. 정약용이 유배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목민심서를 읽을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좋아’라고 대범하게 수용하면 분명 또 달리 열린 문을 발견하게 된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는 ‘문제를 푼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내게 주어진 문제니까 내가 풀어야 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겁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시험지를 풀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험 문제의 영역도, 난이도도 전부 다른 거지요. 그래서 애초에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겁니다. 서로 다른 문제를 풀며 살아가고 있는데 인생의 성적표를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생각에 이르면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이나 좀 불리한 상황에 맞닥뜨려도 차분히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집니다. 최소한 남의 환경과 조건을 내 것과 비교하며 괜히 억울해하는 헛일을 피하게 됩니다. 더불어 내 삶이 주는 문제를 성실히 풀면 그만이라는 의지가 생기지요. 어떤 문제든 일단 수용하게 되는 기술입니다. 미국 정신의학자였던 모건 스콧 펙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 나오는 한 대목을 옮겨보겠습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 문제에 부딪치면 용기와 지혜가 필요해진다. 사실은 이때에 용기와 지혜가 생겨난다.” 힘든 문제도 의연히 대할 때 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좀 더 힘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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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뒷모습의 아름다움
마지막으로 ‘연출자는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어떤 문제를 겪더라도 삶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결국 자신에게 달렸음을 아는 거지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얘깁니다. 내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니까요. 만약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고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라면 ‘이 일에 어떻게 대처하지?’라고 질문을 바꿔보길 권합니다. 문제 해결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질문은 후자입니다. 파도에 저항하기보다 파도를 타겠다는 결심이 수용의 자세겠지요. 기왕이면 어떻게 파도를 타야 가장 근사하게 탈 수 있을지를 궁리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삶을 예술로, 그 삶을 만들어가는 나를 예술가로 여기면 어떨지요? 삶이 던지는 문제를 성실히 푸는 보람 이상으로 멋진 답을 창조하는 기쁨을 맛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바이든의 퇴장’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염두에 뒀던 마무리로 이어가겠습니다. 수용은 때로 결단입니다. 좋진 않지만 받아들이겠다는 판단이지요. 의지로 순리를 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수용의 본질을 생각할 때 늘 떠오르는 시구가 있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낙화’(1963년) 첫째 연입니다. 수용의 기술을 꼽을 때 하나 더 중요한 게 있다면 ‘타이밍’ 같습니다. 때를 거스르지 않고 떨어지는 꽃이라서 아름답다는 사실을 함께 되새겨 봅니다.
조민진│작가
신문·방송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지금은 작가나 강사로 불립니다. 꿈꾸며 노력하는 여러분께 말과 글로 힘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아, 유튜브(‘조민진의 웨이투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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