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도 없는 이 맨해튼 한국 미용실이 ‘K 스타들의 뉴욕 머리 맛집’이라는데
전 세계 트렌드를 주도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 뉴욕이다. 미쉐린 스타를 받은 유명 음식점도 흐름에 뒤처지면 순식간에 손님이 끊기고 퇴출당한다. 이런 살벌한 공식은 음식점에만 유효하지 않다. 패션 중심지 소호(SoHo)나 맨해튼 최고 부촌(富村)인 트라이베카, 타임스스퀘어 인근에서도 생겼다가 없어지는 매장이 부지기수다. 뉴욕 한복판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걸어서 10분이 채 되지 않은 거리에 있는 빌딩 2층에 있는 한 한국 미용실은 그런 면에서 특이하다. 건물 외부에 제대로 된 간판 하나 없다. 그런데도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맨해튼에 방문한 한국 연예인들은 촬영 전 이곳 서승현 원장을 찾았다. 그에게 머리를 맡긴 스타들도 손나은, 한효주, 고준희, 김수현, 제시카, 비, 박진영, 모델 한혜진 등 여럿. 치열한 뉴욕 바닥에서 20년간 살아남은 한국인 헤어스타일리스트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고 했다.
◇“돈 찾아오겠다며 나간 손님이 남기고 간 가방엔...”
1980년대 후반, 대형 미용실이 두어개 수준이었던 서울 청담동의 한 미용실에서 서씨는 견습생으로 미용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든 그는 손님 머리 샴푸 하는 법부터 시작해 어깨너머로 미용을 배웠다. 그러던 1998년 서씨는 남편과 함께 아무런 기반도 없던 뉴욕으로 자리를 옮겼다. 뉴욕에서 미용으로 성공해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는 “당시만 해도 이곳에는 한국에서 미용을 하다 온 사람이 없었어요. 청담동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분명히 여기서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죠”라고 했다. 당시 32가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4개의 미용실이 있었다. 그 중 한 건물 2층에 있는 ‘까까보까’라는 곳에서 일을 시작했고, 2004년 가게를 인수했다. 현지 생활은 쉽지 않았다. 기술을 가진 미용사는 실력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의사소통이 안 되니 어려움이 컸다. 별의별 손님도 다 만났다. 한 번은 비싼 시술을 받고 “은행 가서 돈을 찾아오겠다”며 가방을 맡기고 간 손님이 있었다. 문을 닫는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아 결국 가방을 열어보니 쓰레기만 가득했다. 소셜미디어(SNS)가 없던 시절, ‘입소문’은 최고의 홍보 방법이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특히 많이 가게를 찾았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발을 달고 퍼졌다. 서씨는 “나중에는 워싱턴 DC, 보스턴 등에서 뉴욕에 놀러 오면서 머리를 하고 가는 유학생도 생겼다”고 했다.
◇“K 스타들의 ‘뉴욕 머리 맛집’”
가게가 한창 자리를 잡을 무렵, 당시 뉴욕에 JYP 미국 사무실을 낸 가수 박진영이 “머리를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는 촬영이 있는 날이면 종종 출장 미용을 부탁했다고 한다. 서씨는 여행 가방에 미용 도구를 넣고 맨해튼 거리를 가로질러 JYP 건물에 가서 빈 연습실에서 의자와 거울을 놓고 박진영의 머리를 만졌다. 당시 미스에이 민, 지소울 등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연습을 하곤 했다. 박진영이 “식사하고 가시라”고 해 종종 건물 안에 있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는데 보쌈이 꿀맛이었다고 한다. 이후 박진영은 미국 진출을 꿈꾸던 원더걸스를 서씨에게 맡겼다. 2010년 원더걸스 북미투어 때 2달간 미국 22개 주(州)를 함께 다니며 무대 뒤에서 그들의 머리 스타일을 담당했다. 그는 “당시 미국에 K팝이 막 시작하던 때라 무대 뒤에서 외국인 관객들을 보면서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기도 했어요. 팔에 태극기 문신을 하고 온 사람도 있었다니까요”라고 했다. 서씨 소문은 한국 연예계에 퍼져 뉴욕에 촬영이나 갈라쇼를 하러 오는 스타들이 그를 찾았다. 2016년 미국 방송 NBC에서도 “한국 K팝 가수들이 뉴욕에 오면 이곳에 들른다”고 전했다.
◇코로나 이후 확 바뀐 손님 “지금은 ‘과감’이 트렌드”
상승 곡선만 있는 인생을 찾기는 어렵다. 2020년 전 세계에 불어닥친 코로나 팬데믹은 가게에 치명타를 안겼다. 당시 뉴욕은 3개월간 모든 가게의 문을 의무적으로 닫게 했다.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가게에 미용사는 8명, 하루 손님은 7명이었다. 서씨의 가게를 북적이게 한 한국 유학생들도 이때 전부 한국으로 돌아갔다. 일상이 된 재택근무도 영향이 컸다. 가게를 찾던 현지 손님들은 코로나 때 렌트비가 비싼 뉴욕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다. 장사는 힘든데 렌트비를 꼬박꼬박 받아가는 건물주와 마찰도 있었다. 결국 계약이 끝나기 전 나오는 조건으로 18만 달러(약 2억4000만원)를 내주고 자리를 옮겼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뉴요커들의 머리를 만지는 서씨는 “코로나 이후 손님들이 과감해졌다”고 했다.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다 보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나’라면서 밝은 색으로 염색한다는 것이다. 최근엔 커트로 머리에 여러 층을 지게 하는 ‘레이어드 커트’를 하는 손님들도 많아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님들도 돌아오기 시작해 지금은 코로나 직전의 80% 수준이다. 그는 “최근 K-뷰티가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에는 젊은 미용인들이 부족한 상황인데 기술력이 뛰어난 한국 전문가들이 당차게 해외에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거리에서 가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당황했다. 그 흔한 간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서씨는 “빨리 달아야 하긴 하는데 아직 디자인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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