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 등장한 명품, 프랑스의 힘?
48년만의 최저 인원으로 역대 최고 성적을 낸 대한민국 올림픽팀이 17일간의 열전을 마무리하고 금의환향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이번 파리 올림픽이 무사히 끝난 가운데 이번 올림픽은 세계 최고의 명품 기업이 후원하면서도 친환경 저비용 올림픽을 지향하며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명품의 왕국, 프랑스에서 올림픽을 후원한 명품기업은 다름 아닌 루이비통입니다. 명품의 대명사로 이번 파리 올림픽의 품격을 위해 전격적으로 나선 루이비통은 약 2200억원을 후원하며 최대 후원사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를 통해 메달 트레이, 성화 케이스 등을 제작했고 메달을 전달하는 자원봉사자를 위한 옷을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올림픽의 막은 내렸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그 여운을 음미하고자 오늘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창업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10살에 엄마 잃은 소년, 집을 떠나다
많은 명품이 그러하듯 루이비통 브랜드의 창업자는 브랜드명과 같은 ‘루이 비통’입니다. 1821년 8월 2일 루이 비통은 프랑스의 안쉐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업과 목공업을 주로 해왔습니다. 타고난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어릴 적부터 시간이 날때마다 목공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루이 비통이 10살 때, 모자 제작으로 생업을 이어오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어 아버지가 재혼해 새어머니가 생겼지만 곧이어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불행한 유년시절이 시작됩니다.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던 그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약 470km 떨어진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도착합니다. 어렴풋이 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동경했던 그에게 파리는 도전의 도시였던 셈입니다. 그가 파리에 도착했던 1830년대는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화의 기운이 프랑스로 넘실넘실 넘어오던 시기였습니다.
400km 걸어 도착한 파리, 손재주로 눈에 띄다
루이 비통은 파리의 성공적인 포장 사업가이자 트렁크 제작자인 무슈 마레샬을 찾아가 자신의 뛰어난 손재주를 선보이며 견습 직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특히 루이 비통은 많은 양의 짐을 차곡차곡 쌓고 정리하고 싸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꼼꼼하고 섬세한 그의 솜씨는 금새 귀족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습니다. 결국 프랑스 왕실 황후인 외제니 드 몽티조의 발탁을 받아 그녀의 짐을 싸는 일을 전담하기도 했습니다.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루이 비통은 더이상 견습 직원으로 일하기보다 자신의 가게를 차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결국 외제니 드 몽티조의 후원으로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자기 이름으로 트렁크 제작 및 포장 전문 회사를 창업합니다. 자신의 첫 가게가 문을 연 카푸신 4번가라는 도로명은 루이 비통을 대표하는 핸드백 ‘카푸신 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루이 비통은 가게 밖에 ‘가장 깨지기 쉬운 물건을 안전하게 포장합니다’라고 써 붙여뒀습니다. 그만큼 안전하고 튼튼한 트렁크를 만드는데 자신이 있었다는 거였죠.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해온 그는 1854년 33살의 나이에 클레멘스 에밀리와 가정도 꾸렸습니다.
고정관념 깬 직사각형 트렁크, 스타된 루이 비통
그는 계속해서 더 튼튼하고 예쁜 트렁크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1858년 그는 런던 패션 트렌드에 영감을 받아 완전히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트렁크를 선보였습니다. 기존 트렁크는 모서리 부분이 둥그스름해 다소 공간 낭비가 불가피했고 여러개를 쌓기도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직사각형으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내구성이 강하고 가벼운 캔버스 소재 트렁크를 독자적으로 개발해냅니다. 이는 마차 등에 쌓더라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즉 디자인과 성능 두마리 토끼를 잡은 모델이었습니다. 이 트렁크는 출시 직후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처음부터 대박난 비통, 아예 공방을 짓다
30대의 나이에 큰 성공을 맛본 루이 비통은 그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1859년 좀더 넓은 부지를 찾아나선 그는 파리 북동쪽에 있는 아니에르라는 지역에 공방을 차리게 됩니다. 작은 가게에서 혼자서 만들던 트렁크는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결국 직원을 더 뽑아서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공방 시스템을 도입한 것인데요. 처음 20명으로 시작했던 해당 공방은 사업이 번창하며 계속 확장됩니다. 그가 죽은 이후인 1900년엔 100명, 1914년에는 무려 225명의 직원들이 이 곳 공방에서 일하게 됩니다.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며 루이 비통은 아예 자신의 집도 공방으로 옮겨옵니다. 이곳 아니에르 공방은 루이 비통 브랜드의 초석이 됐습니다. 특히 이곳에선 현재까지도 계속 루이 비통 제품이 제작되고 있으며 루이 비통이 머물렀던 저택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디자인과 성능이란 두마리 토끼를 잡은 루이 비통의 트렁크는 명품 트렁크란 별명을 얻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이 영원하진 않았습니다. 1870년 터진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으로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명품이나 사치품격인 루이 비통의 트렁크를 찾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한 전쟁으로 어수선했던 공방에는 도둑들과 떠난 직원들로 인해 많은 작업물이나 재료 등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루이 비통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사업을 이어 나갈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결국 파리 중심부의 다른 부지를 찾아 새로 매장을 열고 사업을 이어갑니다.
이후 루이 비통의 트렁크는 바다 건너 영국까지도 소문이 났고 결국 1885년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매장을 열며 첫 해외지점도 오픈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트렁크에 자물쇠를 달다
또한 당시 소매치기가 판을 치며 각종 트렁크의 보안이 중요해진 점도 루이 비통은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와 그의 아들 조르죠 비통은 트렁크의 보안을 강화할 새로운 기술도 도입했습니다. 모든 잠금장치 패턴을 다르게 만들어 열쇠를 제공했고, 분실에 대비해 여분의 열쇠를 제작, 소유자의 이름으로 등록된 작업실에 보관했습니다. 트렁크에 자물쇠를 부착하는 것은 당시만 해도 아무도 생각 못한 아이디어였고 또다시 루이 비통의 트렁크가 최고라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진품보다 많은 가품, 결국 디자인 혁신을 낳다
인기가 있으면 견제가 있기 마련이죠. 시장엔 짝퉁 루이비통 트렁크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비슷한 소재의 제품들이 쏟아지자 고민끝에 루이 비통은 서로 다른 색의 직사각형이 교차하는 ‘다미에 캔버스’ 디자인을 개발해 트렁크에 덧입혔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모조품이 판을 치자 1896년, 루이 비통의 상징과 같은 모노그램 패턴을 입힌 트렁크 제품이 새로 개발됐습니다.
창업자 루이 비통은 1892년 앓고 있던 암으로 인해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생전부터 아들과 같이 사업을 이끌어왔던데다 아들 조르죠 역시 사업적 감각이 뛰어난 덕에 사업은 더욱 번창했습니다. 그는 파리의 명품거리 샹젤리제 거리에 7층짜리 루이 비통 매장을 열었고 손자인 가스통-루이 비통은 트렁크에 국한됐던 제품 라인업을 핸드백, 지갑 등 패션 아이템으로 대거 확장하며 지금의 명품왕국을 만들었습니다.
1987년 샴페인 브랜드 모엣&샹동, 꼬냑 브랜드 헤네시와 합쳐져 현재는 루이 비통 모엣헤네시(LVMH) 그룹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LVMH 그룹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약 300조원의 재산을 보유한 세계 1위 부자이기도 합니다.
명품 제국의 맏형격으로 LVMH의 간판으로 활약하고 있는 루이 비통. 올림픽 정신과 명품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파리 올림픽의 품격을 선보였다고 자평한다는 프랑스의 자부심은 단순히 명품이란 허영심이 아닌 100년 넘게 쌓아 올린 장인 정신에 대한 존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