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과 북극, 지구 대기·해류 휘젓는 거대한 손

한겨레 2024. 8. 1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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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금희의 나의 폴라 일지
미래는 남극풍을 타고
친환경 생분해성 재질 풍선 띄워
대기중 블랙카본·구름씨앗 측정
푸른 하늘 흰 점으로 멀어져 간
불확실성에서 길어올리는 낙관
1 포르투갈팀이 각종 센서를 장착한 라디오존데를 매달아 띄울 준비를 하는 모습. 2 풍선을 띄우기 위해 헬륨 가스를 주입하고 있다. 3 풍선은 지상에서 30킬로미터까지 올라가 하늘의 기압, 기온, 풍향, 풍속 등을 측정한다. 1·2·3 김금희 제공

옆새우 채취를 다녀온 다음날,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남극에 와서 모든 것이 좋았지만 작업할 시간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현지에서 되도록 많은 기록을 남겨야 실감이 담길 텐데 영 틈이 나지 않았다. 드라이랩에 앉아, 자꾸 나를 유혹하는 이미 떠난 연구대원 책상의 카스타드 박스(결국 며칠 뒤 나는 그걸 먹어치웠다)를 의식하며 노트북을 열었다. 복도에 나와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과학자들의 대화에 최대한 관심을 끊고 막 키보드를 두드리려는데 식생팀 식구들이 표본 분류 작업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끼리 하는 거죠?” 엠(M) 박사가 물었다.

“작가님은 오전에 작업해야 한다고 하시던데.”

“못 오시면 우리끼리 하면 되죠.” 엘 박사가 선선히 답했다. 순간 갈등이 일었다. 그래, 남극까지 와서 책상에 앉아 있으면 뭐 하나. 이번에도 내 노트북은 쉽게 닫혔다. 복도 테이블에는 낫깃털이끼와 튜브, 가위, 핀셋 등이 놓여 있었다. 포터 소만(Potter Cove) 곳곳에서 고생하며 채집한 낫깃털이끼들이었다. ‘뿌리째’, 더 정확히는 ‘피트층째’ 뽑아온 그것을 정리해 윗부분만 튜브에 담으라고 엘(L) 박사가 알려주었다.

“음악 틀어도 될까?”

벡터가 물었고 우리가 동의하자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식물에게서 느껴지는 축축한 물기, 오래전 죽은 낫깃털이끼의 거무죽죽한 세포들, 이따금 물살처럼 일었다가 다시 조용해지는 대화, 핀셋으로 보풀처럼 가느다란 이끼들을 집어 들 때의 몰입감, 친구들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 이 편안함을 돌아간 뒤에도 기억해야지 싶었다. 작업을 마치고 웨트랩으로 갔더니 연안생태팀도 표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치 미술 작품을 만드는 듯한 과정이었다. 복도에서 늘 활달하게 탁구를 치며 호탕하게 웃던 두 사람이 아주 섬세하게 조류들을 흡습지에 펼쳐놓고 있었다.

날씨 다음으로 중요한 건, 밥

연안생태팀이 작업한 조류 표본들은 마치 하나의 근사한 그림들 같았다. 김금희 제공

“저 이거 많이 봤어요. 너무 예쁘더라고요. 반했어요.”

아직 어제의 해변에서 마음이 돌아오지 않은 나는 트레이에 담긴 조류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풍선 아트로 만든 푸들처럼 생겨 기분이 경쾌해지던 한 개체를 가리켰다. 고 연구원은 ‘아데노시스티스 유트리큘라리스’(Adenocystis utricularis)라고 알려주고는 메모지에 철자를 적어주었다. 올록볼록한 줄기 안에는 수분이 차 있어 탈수를 막아준다고 했다. 역시 자주 보였던 다시마처럼 생긴 개체는 ‘팔마리아 데시피엔스’(Palmaria decipiens)로 우리가 지내는 킹조지섬 바닷속에 아주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혹시 잡숴보시겠어요?”

고 연구원이 팔마리아 데시피엔스 한 조각을 내밀었고 나는 냉큼 받아 입에 넣었다. 약간 건건한 소금기에 나무껍질을 씹는 듯 좀 질긴 식감이었다. 남극해 염도는 지구 평균보다 높으니까 짤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런 조류들은 고둥이나 옆새우들의 좋은 먹이가 된다고 고 연구원이 설명했다. 생태적 순환의 출발점인 셈이었다.

이윽고 여섯 시가 되자 오늘도 어김없이 ‘어서 와 맛있는 반찬이 사라지기 전에 밥을 먹으라’는 꼬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이제 이 안내음이 조금 무섭게 들린다고 농담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완전한 사육’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한 양질의 칼로리 공급으로, 나는 평생 가장 무거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밥맛은 매일매일 좋았다. 셰프의 역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혼밥’이 없는 식탁이어서이기도 했다. 내가 혼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여기 와서야 깨닫고 있었다. 자주 혼자 여행하고 카페에서 작업하다 늘 혼자 점심을 먹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먹을 수 있게 되자 뭐랄까, 식탁 앞에서의 내 텐션이 달라졌다. 더 많이 먹고 더 즐겁게 먹었다.

식당으로 향하면서 기지 스탬프도 함께 챙겼다. 기지 방문자들을 위한 도장을 방으로 가져가 내가 가진 종이에 잔뜩 찍어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 편지 쓸 때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남극의 아주 미세한 입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복도의 고풍스러운 단층장 위에 스탬프를 올려놓고 돌아서는데 화이트보드에 누군가 써놓은 글귀가 보였다. 며칠 전 문제의 “일부러 그러는 거죠?”가 생각나서 읽어봤더니(그 문장은 며칠 뒤 사라졌다) “김밥 먹고 싶어요”라는 말이었다. 그렇듯 애절하게 김밥 사랑을 표현한 주인공은 포르투갈팀의 클라우디우, ‘구름’ 연구원이었다. 김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매주 식단이 발표될 때마다 ‘김밥’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셰프가 허락한다면 내가 한번 만들어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웬만한 한국인들은 대체로 한 김밥씩 하니까.

먹는 일은 기지에서 날씨 다음으로 중요한 이슈였다. 외국 과학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식단으로 먹었고 초계국수, 잡채밥, 콩비지찌개 같은 한식들을 가리지 않고 해치웠다. 한국 음식에 대해 이미 잘 알아서 최고 유명한 음식이라며 불닭볶음면을 추천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먹을 수 있니? 하고 되물어왔다.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는 진정한 매운맛의 민족인 척했던 나와 엘 박사와 엠 박사 그리고 벡터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같은 팀의 요스바니는 불닭볶음면은커녕 비빔면도 먹기 어려워하는 체질이었다. 자유 배식을 하는 날 엘 박사가 비빔면을 만들어주자 맛있다며 열심히 먹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냉장고에서 마요네즈를 가져왔다. 맵기를 조절하려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요스바니는 점점 귀까지 빨개졌고 이윽고 엘 박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세상에, 요스바니, 이건 와사비 마요네즈야!” 우리는 미리 알아채지 못한 미안함에 물을 마셔라, 양념장을 덜어내라, 아예 면을 씻어라 하며 허둥댔다.

머리만큼이나 손발품도 필요해

연구팀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낫깃털이끼를 분해해 튜브에 담는 작업을 했다. 김금희 제공

잘 끓인 감자탕으로 저녁 열량을 채우고 나니 엠 박사가 갑티슈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그동안 숱하게 애벌 설거지를 해온 엠은 심리전과 기 싸움이 작용하는 가위바위보 대신 아주 우연하고 민주적인, 그래서 완전히 운에 맡겨야 하는 제비뽑기로 설거지 멤버를 정하자고 제안했고 마침내 도구까지 직접 제작해 온 것이다.

사람 수만큼 탁구공을 넣고 그중 하나에 “수고염^^”이라는 도발적인 메시지를 적어넣었다. 그동안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해 거의 걸리지 않던 홍 선생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가위바위보의 빈번한 패자였던 사람은 엠 박사, 나 그리고 카밀라 언니였다. 어찌어찌해서 홍 선생과 카밀라 언니만 남았을 때면 나는 “박사님, 홍 선생님 눈을 절대 보지 마세요!” 하고 응원하곤 했지만 별 소용 없이 이기는 사람들은 계속 이겼고 드디어 엠이 판 자체를 바꾸는 아이디어를 낸 거였다.

엠 박사는 탁구공을 잘 섞은 다음 직접 들고 다니며 뽑게 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흑화(?)된 기운이 느껴졌다. 엠의 미소에서는 그동안의 억울함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은은한 결기가 흘러나왔다. 대체 애벌 설거지가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긴장시키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도 탁구공을 뽑았고, 엠이 멋진 글씨로 써놓은 “수고염”이라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는 실력도 운도 없는 인간인가 싶은 자책이 잠깐 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패배자가 되어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가는데 원파고가 내일 아침 풍선을 띄우는 장면을 보겠느냐고 물었다. 드디어! 하는 기쁜 마음으로 약속 시간을 잡고 방으로 돌아와 얼른 세탁기부터 돌렸다. 속옷과 양말, 매일 입다시피 하는 티셔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수건들이었다. 한국에서 챙겨 온 그 많은 짐 중에 긴 머리칼의 소유자에게 제일 중요한 수건이 빠져 있었다. 기지에서 지급되는 수건은 한정적이라 부지런히 빨아서 말려두어야 했다.

그렇게 남극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잘 준비를 했다. 얼마 읽지 못하고 잠들 테지만 늘 그렇듯 책을 머리맡에 놓았고 짧은 일기를 썼다. 내용을 다 옮기지는 못하지만 그날의 마지막 말은 “이 대륙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이 된 것 같다”라는 문장이었다.

다음날 아침, 원파고와 연구동 현관에서 만나 고층대기관측동을 향해 걸었다. 연구동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고층대기관측동은 무전 교신과 차량 접근이 금지된 약간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기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창고 같은 겉모습과 상반되는, 크고 작은 버튼들의 불빛을 반짝이며 컴퓨터들이 전파를 수신하고 데이터를 쌓고 있는 첨단의 분위기였다.

“이게 다 뭐예요?”

원파고는 자기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대기과학자들이 각자의 프로젝트를 위해 설치해놓은 것으로 한국까지 자료가 전달된다고 했다.

“이건 블랙 카본을 측정하는 장비예요. 쓰레기를 태우면 생기는 일종의 검댕 같은 거요. 그게 대기에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는 거죠.”

“남극 하늘에도 그런 게 있어요? 이렇게 맑은데.”

원파고는 그렇다고 했다. 남극 대륙에 들어와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도 있고 바람을 타고 외부에서 날아오는 것도 있다고. 과학자들이 설치해놓은 전선과 배관들은 웬만한 정글 식물만큼이나 이리저리 얽혀 아주 복잡해 보였다. 연구대원들이 배관을 하나하나 사 들고 와 직접 설치한 것들도 많다고 했다. 하늘을 관측하는 데도 남극에서는 머리만큼이나 ‘손발품’이 필요하구나 싶었다. ‘구름 씨앗’의 양을 재는 기기도 있다고 설명이 이어졌는데, 구름 씨앗이라니 단어 수집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이었다. 관측동 안 작은 방에는 구름이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옥상 안테나를 통해 도착한 기상 데이터를 체크하는 중이었다. 그런 현재의 정보 위에 풍선에 매달아 보내는 센서, 곧 라디오존데(Radiosonde)로 측정하는 새 데이터가 쌓이게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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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 레디? 예스!

한참 컴퓨터 작업을 하던 구름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고 풍선을 띄우러 가자고 앞장섰다. 그렇게 해서 옮겨간 곳은 비행기 격납고처럼 생긴 커다란 창고였다. 경비행기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듯한 크기였다. 요스바니가 남극 하늘로 날아갈 풍선을 꺼내 보여주었다. 베이지색 풍선은 차곡차곡 접혀 손바닥만 한 비닐에 들어가 있었다. 매일 이렇게 풍선을 날리면 혹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분해성 라텍스 재질이라 시간이 흐르면 흙과 균질한 성분이 된다고 했다.

“요스바니, 장갑이 왜 없어?”

구름이 물었고 요스바니가 다시 원파고에게 혹시 장갑이 있는지 묻더니 할 수 없이 관측동으로 가지러 갔다. 풍선 표면에 가루가 묻어 있어서 장갑이 필요하다고 원파고가 설명했다. 이윽고 웬만한 중학생만 한 크기의 풍선이 펼쳐졌고 구름이 헬륨가스 호스를 풍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밸브를 열자 풍선이 부풀기 시작했다. 처음 호리병처럼 펼쳐진 풍선은 드디어 보름달 같은 완전한 구(球)가 되었다. 구름이 노끈으로 풍선 입구를 칭칭 동여맸고 “아 유 레디?” 하고 우리에게 물었다. “예스!” 하고 외치자 창고 문을 열었고 요스바니가 구름이 은은하게 깔린 푸른 하늘로 풍선을 날렸다. 풍선은 구름들 쪽으로 이동하면서 하나의 작은 흰 점이 되었다.

남극 하면 우리와 먼 곳처럼 들리지만 막상 여기 와서 알게 된 건 남극의 모든 것이 우리 삶을 관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구의 양끝인 남극과 북극은 세상의 대기와 해류를 이동시키는 아주 거대한 손이었다. 이곳의 변화들이 지구를 휘저어 우리 일상을 조형하고 있었다. 기후라는 말 뒤에 붙는 변화, 위기, 때론 전쟁과 습격이라는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매일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같은 시각에 풍선을 올려 하늘을 살피고 있다는 점은 작은 낙관처럼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포항의 센터에서 매일 풍선이 올라간다고 했다.

오후가 되어 드디어 책상에 앉아 한국에서 보내온 교정지 파일을 보고 있는데 이리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소설가라고 들었어” 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지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남극에 관한 소설을 쓸 거라고. “아 그렇구나.” 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나 유령을 본 적이 있어” 하고 말했다. “유령을, 봤다고?” 나는 과거시제를 강조하며 다시 물었다. 이리나는 약간은 중성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마치 남극풍이 깃든 것처럼. “응 봤어.” 이리나가 창밖의 해안선을 먼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김금희│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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