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권선희 “사람과 신 사이 들어간 그를 기다리는 시간”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4. 8. 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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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를 든 채 구룡포 선창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바닷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멍게 첫 작업한다. 멍게 가지러 온나.” 새벽 해녀 ‘성님’에게서 멍게를 얻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전에는 아무 때나 멍게를 잡았지만, 지금은 어촌계 규약에 따라 여름 한철에만 작업을 했다.

오전 11시. 휘이~ 휘이~ 소리를 내며 물안경을 쓴 해녀들이 참았던 숨을 트면서 하나 둘 물 위로 뜨기 시작했다. 적게는 예순 살 후반부터 많게는 여든 중반에 이른 해녀들은 아침 일찍 물속으로 들어가 서너 시간씩 물질을 했다. 망사리 가득 멍게를 메고 바닷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시멘트 경사로를 올라섰다.
이때 뭍에 거의 이른 한 해녀가 물 위에서 천천히 몸을 뒤집는 게 아닌가. 팔순을 넘긴 춘자 성님이었다. 여름 물질을 시작할 이맘때는 한창 따가운 볕과 여전히 차가운 바닷물이 만나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주위 해녀들이 깜짝 놀라며 물에 잠긴 춘자 성님을 붙잡아 시멘트 위로 끌고 나왔다. 막 물에서 나온 다른 해녀들도 시멘트 바닥에 누운 춘자 성님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이나 이빨로 춘자 성님의 물옷을 찢기 시작했다. “119, 119! 사람 간다! 119 전화하라!” 고래고래 소리도 질렀다. “춘자야, 가믄 안된데이, 살거래이.”

한 해녀가 춘자 성님의 몸을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또다른 해녀는 인공호흡을 했다. 춘자 성님의 낯빛은 핏기를 잃고 입술은 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춘자야, 인나거라, 인나라.”

2년 전 7월2일 그날, 구룡포 해녀들은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는 춘자 성님을 빙 둘러싸고 발을 동동 굴렸다. 이 모습을 함께 울먹이며 지켜보던 시인 권선희는 문득 언젠가 뉴스에서 본 참돌고래들이 떠올랐다. 숨을 놓은 동료를 온몸으로 떠받치며 애쓰던 돌고래들, 수면 위로 분기공을 띄워 살려내려던 그 안간힘이.

해녀들이 늘 정답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작은 일로도 다투고, 패를 짓고, 그러다가 다시 화해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닷가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며 긴 세월을 함께 살았기에 정이 든 만큼 감정의 골 역시 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다라는 거대한 세상으로 들어가 목숨을 담보로 밥을 버는 동안에는 부모 형제를 넘어서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물질을 할 때면 그들은 마치 바다 속에서부터 함께 살던 부족, ‘물의 부족’ 같았다.

그들의 간곡한 호소가 닿은 것일까. 구급차가 올 즈음, 마침내 춘자 성님이 턱 하고 숨을 뱉었다. 물인지 숨인지 입에서 아주 작게 톡 떨어지듯. 창백한 낯빛도 서서히 생기를 되찾았다. 한 해녀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야, 인자 됐다.” 얼마 뒤, 해녀들과 함께 동동거리며 울었던 그에게 시가 찾아왔다.

“바닷물은 차고 볕은 한없이 따가운 칠월 초순 첫 멍게 작업이었다/ 휘이휘이 숨 뜨며 방파제 돌아 나오던 춘자 형님이 그만 정신을 놓았다/ 후불 형님과 돌돌이 형님이 둥둥 뜬 몸 끌고 와/ 물옷 물고 찢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119, 119, 사람 간다, 119 전화해라// 순식간에 모여든 해녀들이 둥그렇게 에워싸고는 발을 동동 굴렸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돌아가는 목숨을 붙들겠다고 울부짖었다// 살아래이/ 살 거래이/ 가믄 안 된데이/ 살아야 한데이/ 춘자야 인나거라. 인나라, 인나라// 숨을 놓는 동료에게 주문을 걸던 고래들이 생각났다/ 주둥이를 힘껏 물 위로 차올려 몇 번이고 분기공 띄우려 애쓰던 참돌고래들/ 가라앉은 삶을 떠받치며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구급차가 올 때까지 울며불며 심장 두드리던 해녀들이/ 춘자 형님 숨 하나 뱉자 가슴 쓸어내리며 주저앉았다/ 물안경 자국 깊은 얼굴에서 바닷물이 눈물처럼 흘렀다// 됐다, 인자 됐다”(「물의 말」 전문)

2000년 봄 이래 20년 넘게 포항 구룡포 앞바다에서 물의 부족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들의 곡진한 말을 빌어 ‘물것’과 ‘갯것’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노래해온 시인 권선희가 시편 「물의 말」을 비롯해 59편의 시를 묶은 신작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창비)을 들고 돌아왔다. 『구룡포로 간다』(애지), 『꽃마차는 울며 간다』(애지)에 이은 세 번째 구룡포 연작시집이다.

“니 오데 사노?” 처음 노랑머리에 빨간 바지를 입었던 서른여섯의 그가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다방 종업원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구룡포 사람들은 그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자주 물었다. “병포리 삽니더.” “병포리 오데?” 주소를 말하면 되물었다. “그 옆집에 누가 살아.” “아, 저도 그분을 알아요.” 그들이 막걸리 집을 드나들던 그에게 마음을 내준 것은 함께 사는 ‘이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친밀감이 생겨났다. “뭐가 궁금하노?”

바닷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잡은 고기를 나누고, 화와 기쁨을 나눴다. 나중에는 들려줄 이야기를 미리 준비하고서 그를 기다렸다. 바닷가 부족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는 그에겐 또 하나의 바다였다. 바닷가 부족의 말을 샤먼처럼 귀 기울여 받아 질박하게 적어 내려갔다. 어느 새 그에게도 풀풀 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시집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다와,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갯것’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담배 물고 먹좆 꽂아 먹줄 튕기는 당당한 배 목수” 출신 정남씨(「정남씨 연대기」), “목욕탕 구석 장판 깔린 간이침대가 일터”인 ‘화자씨’(「첫눈」), “돌아가는 거는 참말로 디요”라고 한탄하면서 병든 영감의 마지막을 돕는 할머니(「말년」), “부모 대신 업어 키운 동생 칼”에 맥없이 세상을 떠난 ‘만석씨’(「웃는 사람」)⋯.

시인 권선희가 20년 넘게 함께 울고 웃으며 지켜본 구룡포 ‘물것’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는 왜 구룡포에 가야 했을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권 시인을 지난달 11일 경기도 가평의 카페 ‘그래島(도)’에서 만났다.
―「물의 말」에 나오는 춘자 성님은 이후 어떻게 됐는지.

“구급차가 와서 싣고 갔다. 폐에 물이 찼다고 하더라. 나중에 동료 해녀들이 중환자실에 입원한 춘자 성님을 병문안 가선 타박을 했다. 이제 물질 좀 고마하라, 담에 또 이런 사단을 내면 죽어도 모른다고. 속내는 살아줘서 고맙단 말이라는 것을 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던 춘자 성님은 퇴원하고 얼마 뒤 또 망사리에 두롱박 울러 메고 물질하러 꿈찔꿈찔 나오신다. 물질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서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춘자 성님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살라고, 살아내라고 울부짖던 목소리는 귀에 똬리를 튼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분명 저 깊은 바다 속 어디선가에서 온 부족인 게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는 보름쯤 뒤에 쓴 것 같다. 당시 상황을 단숨에 쓰고 거의 수정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편집자가 시집 제목을 이 시편에서 뽑더라. 아름다움은 누누에게나 통하는구나 싶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는 ‘바닷가 부족’들은 다른 바다 생명들과 하나가 된다. 「고래잡이는 고래로 돌아가고」는 바닷가 부족이나 그들의 삶을 고래로 은유한 시편.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면 새벽 인검소 출항증 받아 고래포 걸고 물살 타는 파도였다. 위태로운 망루에 앉아 쌍안경으로 살피면 저 멀리 고래떼가 풀쩍풀쩍 솟으며 놀았다. 분기공 세워 뿜는 고래의 날숨을 따라 언제 어디로 튀어 오를지 모를 행운을 향해 돌진하는 아비라는 바다였다.// 빛나간 창끝에서 튀는 고래 살점에 숨이 터억 막혔다. 새끼 달고 도망치는 상처 난 고래 앞에서는 펄럭이는 마음 다잡는 깃발이었다. 길게 길게 짧게 길게 짧게 길게 뱃고동 울리며 밍크고래 한 놈 매달고 드는 뱃머리에 나부끼는 오색 대어 만선기였다.// 고래가 터지도록 술을 마셨다. 무당 굿판도 벌였다. 좀처럼 고요할 수 없는 생의 바다엔 상서로운 욕지기 만발하지만 더러는 노대바람처럼 명주바람처럼 고비마다 절창의 음절 타고 넘었다. 죽자고 살아낸 평생이 한 마리 고래였다.”(「고래잡이는 고래로 돌아가고」 전문)

―바닷가 사람을 한 마리 고래로 보는 시각이 놀랍다.

“지금은 포경이 금지돼 있다. 그래서 죽은 고래만이 기중기에 끌어올려져 해체되곤 한다. 구룡포에 살면서 서른 마리 가까운 고래들을 마중하고 배웅했다. 예쁜 참돌고래부터 곱새기라 부르는 밍크고래, 드물게 범고래와 참고래까지. 고래 눈은 회색 바탕에 검은자위인데, 희안하게 깊다. 고래를 보고 있자면, 오래 전 목선을 타고 나가 고래를 잡던 어르신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고래잡이들은 높은 망루에 올라 고래를 살피고 발견하면 이내 가까이 접근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고래포를 쏴서 고래 몸에 작살이 꽂히면 그때부터 고래를 잡으려는 배와, 도망치려는 고래의 동선이 같아진다. 똑같이 파도를 넘으며 고래가 힘이 빠질 때까지 따라간다. 어미 고래를 잡을 때 간혹 새끼가 붙는 경우가 있다. 어미 고래가 피를 흘리며 가고, 새끼 고래도 울며 따르고, 사람 역시 어미 고래를 쫓아간다. 새끼 고래가 처지면, 어미 고래는 창끝처럼 생긴 등지러미에 새끼를 끼워 나아간다. 어미 고래에 몽실한 새끼 고래가 붙어 있으니 그 고래를 잡는 마음인들 즐겁기만 하겠나. 포경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불쌍해도 우야노. 지는 괴기고 내는 사램이니. 가기는 간다마는 내도 새끼가 있으니 맴이 억수로 씨는 기라. 윗대로 갈수록 바닷가 사람들과 바다의 것들은 한 덩어리였던 것 같다. 물것이 물 것을 대하는 나름의 자세가 있었다고나 할까. 포경선이 고래를 잡아 항구로 돌아오면서 만선 신호를 보내면 마을 사람들이 포구로 몰려나온다. 배가 도착하고 고래가 어판장에 올려지면 동네는 잔치판이다. 육회처럼 떠서 먹고 솥에 고래 기름을 끓여 고래 과자도 만들어 먹는다. 횡재에 선주 마누라 입은 째질 대로 째진다. 제일 신나야 할 선주는 소주 한두 잔 걸치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어미 고래는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얹어가꼬 가는데, 우리 집 둘째 놈은 새끼 맡겨놓고 소식조차 없다. 그는 탄식한다. 사람이 고래만 같으믄 자식 놔두고 달아날 놈 아무도 없을 것인디.”

조업 중 방향을 잃거나 우연히 월경했다가 돌아온 어부들을 간첩으로 조작했던 사건을 다룬 시편도 있다. 암울한 군부독재 시절의 민낯이다. “한 오십년 전이요, 주문진꺼정 가가 조업하다 납북이 돼 부렀지요. 그날따라 오징어가 을매나 많던고. 아고야 돈 쫌 쥐겠다 캤는데, 고마 기름이 떨어져가 경계선을 넘은 기라요. 구식 무전기 하나 패철 하나 갖꼬 댕기던 시절이니 펄럭 거리는 물길을 우찌 옳게 읽았겠습니꺼.//⋯인자 살았다꼬 만세도 부르고 그랬는데, 이짝으로 넘어와 가 마 결딴난 기라요. 강릉 포로수용소에 가두고 한 놈씩 끌고 가드만 여인숙 같은 조사실에서 죽도록 두들켜 팹디다. 대가리를 물에 처박고, 고춧가루를 코에 쑤셔 옇고, 각목이고 뭐고 잡았다 하면 쌔리 패부리데요. 그기 간첩이 돼가 왔나 싶어서라요. 그래그래 죽다 살아 열흘 만에 안 풀려났능교. 그란데 구룡포항에 닿을 내리자마자 이번엔 경주 유치장에 또 가둡디다. 거서도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두달 반을 살다 집행유예 2년 받고 제우 풀려났니더. 판결 받던 날 울 어무이가 오셨는데 열여덟살 새끼 몰골 앞에서 까무러치듯 우십시다.”(「「오징어가 꼴도 보기 싫은 이유」 부문)

―이 시는 어떻게 나온 것인지.

“어느 가을 용왕당공원으로 아침 운동을 하러 갔다가 공원을 청소하는 어르신과 말을 나누게 됐다. 요새 오징어가 많이 잡히더라고요. 배가 많이 들어오네요. 날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운동도 하고 청소도 하시는 어르신이었다. 아, 내는 오징어 꼴도 보기 싫어요. 어르신은 1970년대 오징어잡이 배를 탔는데, 이북에도 한번 갔다 왔다고 했다.구구연 사연을 듣고 보니 오징어가 꼴도 보기 싫은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는데, 조업하다가 월북으로 오해받아 고초를 겪었던 강릉과 주문진 어부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보상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더라. 갑자기 어르신 말씀이 떠올랐다. 아,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숱하게 겪었겠구나. 억울하고 분한 세월을 살았겠구나. 당시 구룡포에서 배 두 척이 올라갔다가 돌아오게 됐는데, 선주가 부자인 배의 선원들은 고초를 겪지 않은 반면, 가난한 선주를 둔 선원들만 끌려가서 죽기 직전까지 고초를 당했다고 했다. 씁쓸한 세월, 부끄러운 시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시집에선 무당이나 당골레 등 샤먼을 노래한 시편도 눈에 띈다. 샤먼은 삶과 죽음,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두 세계를 오간다. 이곳으로 살다 저것으로 건너가는, 이곳에서 살다 저곳으로 건너가는 길목에 그들은 매개로 존재한다. 어쩌면 물것들의 삶과 죽음을 물것의 말로 사람들에게 전하는 시인 역시 샤먼인지도 모른다.

“사람으로 살던 고양이와 뱀과 염소와 벌레들이/ 늑대를 숨기고 살던 사람과 새를 숨기고 살던 사람들이/ 불온한 숲이 불안한 강이 불길한 소원이/ 저마다 지은 악업과 선업을 바치는 시간이 있다// 물고기와 눈을 바꾼 사슴이나 사슴처럼 돌아보는 무덤/ 탐욕을 걸친 꽃의 비늘이나 가난을 훔쳐 빛나는 별/ 너를 물어뜯은 나의 붉은 잎과 몇 번이고 나를 죽인 너의 냄새/ 손으로 말로 마음으로 빚은 검은 과보와 흰 과보를/ 안고 뛰는 겹겹의 투신// 사람과 신 사이 몸을 갈아타고/ 갈라진 손등 거역한 운명들 앞에 코트를 벗어놓고/ 들어간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샤먼을 기다리는 시간」 전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편 같다.

“바닷가 사람들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바닷가룰 택한 것이 아니라 본디 물의 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속에 있던 부족이 뭍으로 와 사람의 형상으로 사는 것 같았다. 고래를 잡던 할아버지 말씀을 채록해 <저 바다에 고래가 살았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물가 사람들이 물 것을 대하는 태도가 육지의 사람들과 달랐다. 너나없이 목숨으로 목숨을 연명하지만, 생명의 본질을 잊거나 잃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가슴이 뭉클하게 물들이고 마는 비린내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식이나 태도에 점점 실금이 가고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참고래 한 마리가 포구에 들었다. 근처 축양장에서 죽은 채 발견된 고래는 몸길이가 무려 18.5m에 달했다. 이빨도 컸고, 예뻤다. 사람들은 보호종이라는 이유로 폐기 낙인을 찍고 두 토막을 내서 트레일러에 실어 쓰레기 매립장에 버렸다. 비닐 덮개 한 장 없이 응고된 절단면이 다 드러난 모습으로 동해안대로를 타고 공단을 지나갔다. 찔레 향기만이 상주로 따랐다. 차라리 온 동네 사람들이 고래 고기를 나눠 먹으며 고래를 추억하던 옛날의 방식이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바다와 고래, 함께하는 모든 대상을 향한 고마움이 깔려 있었다. 예의바른 것이다. 매립장에 따라가 고래가 광활한 쓰레기 더미에 폐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죄를 받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샤먼의 행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시집을 여는 시편인 「징」 역시 무당을 노래한 시편이다. 다른 이의 마음이나 전생을 꿰뚫는 무서운 무당이 아닌, 연민 가득한, 참으로 인간적인 무당이다.

“굿당 차리고 물매 대지 않을 때였지. 한 날은 경주 안강 사는 노인네가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고 내를 부르데. 고추가 빨갛게 야물 때니 가을이었어. 가보이 마 그런 오두막이 조선 천지 또 있겠나. 엉기성기 수수대에 흙 반죽한 벽은 기울고 변소도 옳게 읎는 외딴집에서 할미 하나가 구르듯이 기듯이 나와 이 굿쟁이를 맞데. 헛간보다 못한 방 입목에 앉은 영감 반질반질한 골분 단지가 젤로 값나가는 살림 같더라. 방바닥을 베어 물듯 엎드려 빌고 비는 당달봉사 앞에서 징은 쳤다만, 사실 아무것도 안 보였어. 정체 없는 귀신들 다 불러 제끼며 이 불쌍한 인생을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죄 없는 눈을 왜 가렸느냐고, 목이 쉬도록 따지고 대들어도 답을 안 주시더라 못 주시더라. 무당보다 더한 팔자가 가엾어 디립다 징만 쳤지. 징의 길에 내가 펑펑 울었지.”(「징」 전문)

―굉장히 구체적이어서 실화 같은데.

“먹고 살기 위해서 무속을 택했던 할머니 이야기다. 할머니 집에 자주 놀러 갔다. 방에 가면 건넌방 한쪽에 약소한 기도처가 있었고 알록달록한 한복이 무척 많았다. 예쁘다고 말하면 한복마다 깃든 굿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거는 뭐 할 때 했고, 이거는 돈을 많이 받았고⋯. 할머니는 무병을 앓거나 신내림굿을 한 무녀는 아니었다. 남편을 잃고 사는 게 하도 힘들어 뒷산 샘터로 새벽 기도를 하러 다녔다. 하루는 마을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큰아들 사주를 좀 봐달라고 했다. 그 모습이 하도 간곡해 어떻게든 답을 줘야만 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고 무당 흉내를 냈다. 그런데 그 집 큰아들 얼굴이 떠올랐는데, 이가 왕창 빠진 모습이었다. 이가 빠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며칠 뒤, 큰아들이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이가 다 빠졌다고 했다. 제일 놀란 이는 할머니였다. 곧 용하다고 온 동네에 소문이 났고, 그녀는 그 길로 무당 생활을 했다. 신내림은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어릴 때 봤던 굿 흉내를 내면서 애를 썼다고 하더라. 자신은 해결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쪽의 간절한 부탁을 저쪽에 전하는 사람이라는 다짐을 수없이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힘든 이들의 부탁이 들어왔고 할머니는 더욱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배 고사를 해준 배가 고기를 많이 잡아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분이 좋아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고, 자신보다 더한 팔자들을 만나면 함께 울었다. 그들이 존재했던 시절에는 사람도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시는 여러 무녀의 이야기를 듣고 썼다. 다시 살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다.”

시인의 실존적 삶을 그린 작품도 있다. 시편 「기다렸다는 듯」에는 몇 해 전 입원 치료하던 시절의 힘겨운 시절이 풍경화처럼 녹아 있다.

“종합운동장 맞은편 2층 유방외과에서 오른쪽 악성 종양 진단받았을 때/ 기가 찼다 계단에 주저앉아 도로를 질주하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암만, 시인 생에 병마 하나쯤은 다녀가야지//⋯요양병원 내 옆 침대, 어린이집 원장이었던 마흔네살 여자/ 겨울에 밥 한 숟가락 못 넘기고 말라가다/ 벚꽃 피자 죽어 나갈 때/ 친정어미가 벽에 걸린 가발을 챙길 때// 씨벌노무 인생,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시작되었다”(「기다렸다는 듯」 부문)
―씨벌노무 인생, 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깊은 슬픔이 몰려오는데.

“2019년 11월 진단을 받았는데, 이후 매뉴얼과 스케줄대로 세상이 돌아갔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날마다 새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슬픔이라거나 속상함, 억울함 따위 감정은 없더라. 남들처럼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위해서 서울의 여성 전용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팬데믹으로 보호자 면회는 허가되지 않았던 긴 겨울, 수술 직후 방사선과 직원이 초토화된 가슴에 십자가를 그릴 땐 많이 웃었다. 신은 온전한 절망을 주시지 않는구나. 암담한 시간 속에서도 어김없이 봉긋봉긋 웃음이 피었다. 난생 처음 병실에서 만난 네 여자, 자매가 결성됐다. 위암, 유방암, 대장암, 침샘암을 선물 받은 우리는 서로 정성껏 도우며 살았다. 머리가 다 빠졌고 눈썹도 없던 친구는 몰래 외출을 나갈 때면 밍크를 입고 가발을 쓰고 갔다. 부츠까지 당겨 신으면 연예인들이 따로 없을 정도로 예뻤는데, 외출을 다녀오면 긴 가발을 벽에 걸어놓곤 했다. 병포리 바닷가 삼거리에 벚꽃이 피던 2020년도 봄, 옆 침대의 친구가 떠났다. 친구의 친정어머니가 친구의 가발을 챙길 때부터 시작된 눈물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퇴원했는데, 틈만 나면 눈물을 흘렸다. 화창한 날 병포리 삼거리를 지나다가 활짝 핀 벚꽃을 보다가도 눈물을 왈칵 쏟았다. 꽃이 진다는 의미를 실감했다. 도저히 고운 말로 슬퍼할 수 없었다. 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1년간이나 오간 뒤에 그칠 수 있었다.”

춘천행 직행버스가 대관령 고개를 흔들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강릉에서 버스에 탑승한 이래, 친구는 통로 쪽에 앉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친구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마치 죄인처럼 느껴져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모든 일은 직업군인 아버지를 따라 자주 전학을 다니게 되면서 독서나 글에 관심이 없었던 그가 강릉단오제의 율곡백일장에 참가한 것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친구는 또래들보다 독서 수준이 뛰어난 성숙했다. 많은 책을 읽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줬고, 글도 잘 써서 각종 백일장에 단골로 참가했다. 담임교사는 율곡백일장에 가기 싫었는지 외갓집이 강릉인 그에게 친구와 함께 대회가 열리는 강릉에 가라고 했다. 다만 결석 처리가 되지 않기 위해선 백일장에 접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접수한 그는 율곡백일장의 시 부문에 응모했다. 하늘도 무심했던 것일까.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던 친구는 아무 상도 받지 못한 반면, 평소 독서에 관심도 없고 시 한번 써본 적이 없던 그가 덜컥 입선을 해버렸다. 친구는 황당했을 것이고, 그 역시 당혹스러웠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대관령 고갯길에서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자연스럽게 친구의 몸도, 그의 몸도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쏠렸다. 그는 자신의 몸이 밀려서 친구의 몸에 부딪치는 게 미안하고 “황송했다”. 어느 늦봄, 고교 2학년생 권선희는 대관령 고개를 넘는 내내 자신의 몸피가 친구에게 닿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속초에서 온 친구는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한 아이였다. 특히 속초 바닷가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바다의 어떤 이미지, 영상을 떠올렸다. 글을 좋아하는 친구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어떤 눈이 생긴 것이었다. 시인 권선희의 원점이었다.

그는 이후 여러 백일장에 참가했다. 학교에선 율곡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며 백일장마다 그를 학교 대표로 내보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갔다 하면 꼴찌 상이라도 받아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상금을 타서 만두나 사먹자’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응모한 교내 문학상에도 떡 하니 대상을 받았다. “섭이라는 놈이 다닥다닥 붙은 채로/ 바다가 킬킬거리고 웃는다”라는 표현을 당선작에 사용했다. 개구멍 근처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만두를 먹었다.

인생은 본의 아니게 글 쓰는 쪽으로 굴러갔지만, 그럼에도 그는 놀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열심히’ 놀았다. 대학입시에서 전기와 후기 모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인과. 아버지가 재수는 안 된다고 했다. 율곡백일장 및 교내문학상을 수상한 내용과 학교장의 추천서를 더해서 특별전형으로 서울예전 문창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교수님은 왜 교수님의 시와 비슷하게 쓴 친구들의 시만 잘 썼다고 하시는 겁니까?” 한 시인이 진행하는 수업에서, 그는 손을 들고 질문했다. “잘 썼다고 하는 시들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잖아요?” 시인은 수업 시간에 과제로 내준 시 가운데 잘 썼다고 칭찬하는 시들은 모두 시인의 시풍이었다.

그는 버릇이 없다고, 예의가 없다고 수업에서 쫓겨났다. 지겨운 수업 시간, 꼬시구나. 서울 시내로 내달렸다. 명동 레스토랑에 가서 주스를 시켜먹었다. 1983년 서울예전에 입학한 그는 시인 오규원, 이근배, 소설가 최인훈, 김홍신 등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글을 열심히 쓰진 않았다.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했던 신춘문예 외의 문학상에 응모하지 않았다. 시가 돋보이지도 않았다. 원하는 시들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뽑히지 않을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남대문시장에서 산 화장품을 바르고 고고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이 돈이면 옷가게를 하나 차릴 수 있을 텐데. 대학 등록금을 내면서도 빨리 결혼해 옷 장사를 하거나 카페를 차리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백령도에서 근무 중이던 해병대 남편과 결혼했고, 결혼과 동시에 남편 근무지를 따라 군인아파트를 전전했다. 주로 바닷가였다. 외가가 있는 강릉이 첫 바다였다면, 남편이 근무했던 백령도는 두 번째 바다였다.

“당신도 대학 문창과를 나왔잖아?” 어느 봄날, 포스코가 주최하는 샘물백일장이 열리는 포항 문예회관에서 남편이 갑자기 제안했다. 아들이 일기를 잘 쓴다며 학교에서 백일장에 나가라고 했고,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대회장에 나온 그였다. “일반부에 한 번 응모해 봐. 만약에 상을 받으면 내가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서 쏠게.”

남편의 권유에 따라서 학생부 소속의 아들과 함께 백일장 일반부에 참여했다. 그런데 덜컥 일반부 장원을 차지했다. 얼마 뒤, 잡지 『포항문학』를 발간하는 동인모임 ‘푸른시’에서 참여를 권유했고, 한 차례 고사 끝에 가입했다. 곧이어 잡지에 실릴 시를 한편 내달라고 요청받았다. 1965년 춘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권선희는 1998년 잡지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엄마가 담근 술을 외가에 갖다드리라고 심부름을 보내자, 아들은 단술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산을 넘어간다. 한 번은 동인 가운데 동갑내기 교사가 이 같은 내용을 노래한 시 「단술」을 써왔다. 그림과 장면이 있고 잘 읽혔다. 잔뜩 멋을 부리곤 자신의 시와 많이 달랐다. 자신의 시는 그럴듯한데 지어낸 시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본 것도 들은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를 쓰려니 기교만 가득했다. 진짜 시를 쓰고 싶었다. ‘푸른시’ 동인 활동을 하면서 그는 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꼭 거기를 들어가서 살아야 될까.” 남편이 맥주잔을 한 번 쭉 들이켠 뒤 물었다. 남편이 제대를 한 뒤 군무원이 되었다. 더는 이삿짐을 꾸리지 않는 한곳에 살 수 있는 환경이 됐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시가 생각났고, 구룡포가 떠올랐다. 언젠가 남편은 구룡포 장길리 해안 소초에서 근무하기도 했었고, 다시 포항으로 왔을 때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도 구룡포였다.

“3년만 들어가서 살면 포구는 분명히 시집 한 권을 줄 거야.” 그는 바닷가 구룡포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한 발을 걸치는 것으론 안된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 일원이 돼야 한다고. 한 3년쯤 살면 시집 한 권을 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현장의 매력을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그가 가장 좋아했던 글쓰기는 르포였고, 기지촌 여성을 인터뷰해 르포를 쓰기도 했으니까.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남편이 승낙했다. “당신이 지난 13년간 뒷바라지를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 게. 단 13년간 만이야.”

2000년 3월, 그는 무작정 구룡포와 호미곶의 풍광이 바라보이는 곳에 짐을 풀었다. 남편은 근무지를 구룡포로 옮겼고, 아들 역시 한 학년이 72명인 구룡포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중대장 각시’로 불리며 구룡포에 빠져들었다.

언덕빼기 작은 아파트에서 밥을 짓다가도 뒤 돌아보면 바다가 쏙 들어왔다. 바다는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붉거나, 푸르거나, 잔뜩 부풀거나, 검게 울거나. 어느 날은, 어린 청어가 봄으로 풀어놨고, 어느 날은 해무가 자욱하게 풍경을 지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풍경을 넘어 바닷가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물의 부족은 사람마다 허파꽈리처럼 사연을 매달고 있었다. 그들을 닮은 말과 행동이 오고가자, 눈물이 오고가고, 마침내 마음이 오고갔다. 시를 찾으러 왔다는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물의 부족과 뒤엉켜 잔을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비린 물것이 돼 함께 우기와 땡볕, 폭설을 마중하고 배웅하며 살았다.

7년 만인 2007년, 그는 첫 시집 『구룡포로 간다』를 발표했다. 시집은 그해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됐다. 다시 만 10년 뒤 시집 『꽃마차는 울며 간다』를 발표해 백신애 창작기금 수혜를 받았다. 산문집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 등도 출간했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저도 처음에 시를 지었다. 시선과 사유의 틀에 풍경을 넣고 어렴풋이 배운 시작법에 사연을 담았다. 바다라는 생경한 풍경은 마치 보물창고 같아서 넝마주이처럼 나갔다 하면 시를 주워 왔다. 하지만 곧 제가 만드는 어떤 말보다 구룡포에 사는 이웃들이 툭 뱉는 짧은 한 마디가 훨씬 아름답고 절절한 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뭉툭한 말, 헐거운 말, 돌아눕는 말, 에도는 말에는 분명한 온도가 있었다. 아, 이들의 물기 그윽한 말이 우리 같은 것들의 말을 넘는구나. 단지 음성에, 말뜻에 갇혀 있지 않았다. 알 수 없지만, 알 것만 같은 그 무엇이었다. 바닷가 부족, 그들이 저에게 입을 달아주었다. 저는 다만 입으로 그들을 노래했을 뿐이다. 이번 시집의 경우 힘을 하나도 안 들이고 썼다. 막바지에 달라붙어 공들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생겨 제대로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책이 나오고 보니까 안 건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시인까지가 시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역할을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시가 좋은 시라고 본다.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와 이웃을 문학이라는 장르에 얹어서 자신만의 화법으로 전달하는 시를, 시인을 믿고 싶다. 시는 시인이 하는 이야기지만 결국 우리들의 삶이고 기록이다. 마치 오래 전 사람의 난감한 일들을 신께 의논하고 답을 구하던 샤먼처럼 세상의 불협화음과 협화음 사이에 시인이 있고 시가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로의 비전이나 작품에 대한 계획은 어떤지.

“시집을 받아들고 읽으면서 다시는 이런 글을 쓸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코끝이 찡했다. 지난 겨울 구룡포를 떠나왔기 때문이다. 후회가 자주 다녀가지만, 이젠 이곳에서 나의 시간을 살아야만 한다. 가끔 더 나이가 든 내 모습을 상상한다. 펑펑 눈발은 치고 다락방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방바닥에 앉아서 뭔가를 쓰고는 있을 것이다. 어떤 것도 이후를 장담할 수 없지만, 순정한 나의 부족으로부터 살아서는 멀리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 글이 한양병원과 동화루, 관음사와 기와집 구렁, 용왕전과 작곡재에 관한 눅눅한 이야기라면 좋겠다.”

남편이 퇴직하면서 지난해 12월 구룡포를 떠나 경기도 가평으로 거처를 옮겼다. 구룡포를 떠나기 전, 그는 눈을 감고 마음으로 포구를 한 바퀴 둘러봤다. 집을 나와서 어판장 골목을 돌면 나타나는 간판들. 수희미용실, 대중여인숙, 대천식당, 세리미용실⋯경북선원노동조합, 길다방, 주영수산, 까꾸네⋯.

구룡포 석병리 해안 절벽에서 가져온 해국을 화단에 옮겨 심었다. 구룡포에선 바람이 세서 납작하게 옆으로 번지던 해국이 바람이 세지 않는 이곳에선 목만 위로 길어졌다. 해국이나 나나 새 시간에 적응하며 살아가는구나. 지난 4월 건물 1층에 카페 그래島를 열었다. 그래도는 구룡포에 살 때 이름을 지어놓고 늘 바라보던 병포리 앞바다의 작은 바위섬이다. 한쪽 벽에는 구룡포를 사진으로 내걸었다. 제일국수공장 순화 할머니의 낮잠, 뱃공장 순디기네 식구들, 물질하는 해녀 성님들⋯.

“왜 구룡포를 떠나왔는지. 한동안 그 바닷가 구룡포가 너무 그리워 창밖에 내다보지 않았습니다. 창을 열지도 않았습니다. 구룡포 집에선 밥을 하다가 뒤돌아보면 바다가 달려왔는데, 여기 가평 집 앞으론 틈만 나면 탱크들이 지나가더라고요.”

처음에는 야외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날이 무더워 다시 가게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였을까. 하나를 물어보면, 그는 여러 이야기를 바다처럼 풀어냈다. 시 제목만 이야기해도 시에 얽힌 이야기가 마치 해초 줄기처럼 줄줄. 이야기는 근처 식당에서 함께 한 이른 저녁까지 이어졌다.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먼 동해 끝자락 구룡포에선 파도가 치고 있었고, 작은 바닷가 마을에는 여전히 시인이 살고 있었다.

시인 권선희는 새벽 5시쯤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집 근처 가건물에 있는 개 ‘한방이’를 산책시키러 나갈 것이다. 아침을 먹고 잠시 눈을 붙인 뒤 오전 11시 반쯤 카페에 내려가 일을 한다. 오후 6시쯤 가게를 닫고 집 다락으로 올라가서 휴식을 취한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밤 9시면 일찍 꿈나라를 찾는다. 삶과 죽음,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물것의 이야기를 전하는 샤먼을 만나기 위해서. 어느 순간, 삶이 진짜인지, 아니면 꿈이 진짜인지. 그리하여 샤먼을, 아니 샤먼이⋯. 아직도 구룡포의 그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이별까지가 사랑이라는 통속적인 대사를 읇조리며.

“사람으로 살던 고양이와 뱀과 염소와 벌레들이/ 늑대를 숨기고 살던 사람과 새를 숨기고 살던 사람들이/ 불온한 숲이 불안한 강이 불길한 소원이/ 저마다 지은 악업과 선업을 바치는 시간이 있다// 물고기와 눈을 바꾼 사슴이나 사슴처럼 돌아보는 무덤/ 탐욕을 걸친 꽃의 비늘이나 가난을 훔쳐 빛나는 별/ 너를 물어뜯은 나의 붉은 잎과 몇 번이고 나를 죽인 너의 냄새/ 손으로 말로 마음으로 빚은 검은 과보와 흰 과보를/ 안고 뛰는 겹겹의 투신// 사람과 신 사이 몸을 갈아타고/ 갈라진 손등 거역한 운명들 앞에 코트를 벗어놓고/ 들어간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샤먼을 기다리는 시간」 전문)

가평=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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