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두사람, 외로운 이들’ 처럼… 휴식같은 친구 ‘소울오름’ 처럼[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2024. 8. 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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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닌, 자연이 지르는 비명 뭉크의 ‘절규’ 처럼 제주의 여름은 뜨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서귀포시 토평동 솔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서귀포 앞바다의 모습. 멀리 범섬, 문섬이 아른거린다. 제주 강동삼 기자
솔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풍경. 저멀리 산방산이 지평선 끝에 걸려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한없이 바다만 바라보는 외로운 여자,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외로운 남자.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낸 노르웨이 대표적 화가이자 판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비욘드 더 스크림’ 전시에서 만난 ‘두사람, 외로운 이들’(1892년작)이다.

남녀는 서로 가까이 있지만, 그 거리는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 2m보다 더 극복하기 힘들어 보이는 거리다. 여자는 뭉크의 첫사랑 ‘밀리’처럼 보인다. 유부녀를 사랑했던 뭉크. 그래서일까. 젊은 남녀가 불 꺼진 방에서 창밖의 불빛을 피해 커튼 뒤에서 격렬하게 나누는 ‘키스’(1892)마저 고독해 보인다.

화가 뭉크하면 떠오르는 ‘절규’.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이 자행되었던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후 20세기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 된 ‘절규’는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란다. 뭉크는 오슬로 피오르에 인접한 에케베르그 언덕을 산책하다가 느낀 강렬한 감정을 그려냈단다. 뭉크는 파리 유학시절인 1892년 습작노트에 ‘해질 무렵 친구 두명과 함께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 노을로 붉게 물들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우울감으로 울타리에 기대고 말았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의 거대하고 끝없는 비명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솔오름 전경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서울신문이 창간 120주년 기념으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오는 9월 19일까지 열리는 ‘비욘드 더 스크림’ 전에 전시된 ‘두사람, 외로운 이들’(1892년작). 제주 강동삼 기자

# 관광객으로 제주에서 1박2일 여름 휴가… 첫 걸음은 솔오름

<38>소울메이트같은 솔오름

본지 창간 120주년 기념으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9월 19일까지 계속되는 뭉크전. 전시회 밖 현실의 풍경은 뭉크의 ‘절규’보다 더 붉은 비명을 지르고 있는 느낌이다. 강렬한 태양, 움직이면 비오듯 흐르는 땀,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 기후변화로 정말 자연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 듯 하다.

건강검진차 서울 들렀다가 뭉크전을 본 뒤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불현듯 드는 생각. 관광객 모드로 제주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상상을 해본다. 제주사람이 제주도에 관광 온 듯 지내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제주촌놈의 1박2일 제주에서의 여름휴가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 첫걸음은 서귀포시 토평동 산16번지 일대 솔오름. 제주 오름탐방은 MZ세대의 대세 여행트렌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나 역시 대세를 따라볼 참이다. 숙소가 서귀포인만큼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제격인 오름이 솔오름이었다.

높이는 113m로 낮은 오름이지만,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넘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서귀포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 전망좋은 오름이다. 솔오름의 솔은 ‘쏠(쌀)’을 이르는 옛말로 한자로는 미악산(米岳山)으로 불린다. 주변에는 멀리 떨어진 고근산오름이 유일할 정도여서 홀로 돋보이는 오름이다.

오름 초입에는 고민상담 ‘분홍 우체통’도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시민의 사회적 활동이 위축되자 우울감과 육아 문제 등 말 못할 고민을 들어주는 우체통이란다. 처음엔 ‘여성 고민상담 우체통’으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시민이나 관광객들로 확대했다. 솔오름 외에도 새섬공원, 외돌개 인근 등 3곳에 설치돼 있다.

솔오름은 A코스와 B코스로 나뉘는데 현재는 A코스 일부구간이 폐쇄돼 B코스를 이용해야 한다. 오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삼나무숲으로 우거져 숲 밖의 가마솥더위가 식히는 기분이다. 한라산 중턱이어서 비까지 왔는지 대지도 촉촉히 젖어 있었다.

솔오름 초입에서 만난 분홍우체통, 삼나무와 편백나무숲길, 제주 강동삼 기자

# 서귀포 시가지 한눈에… 소울메이트 같은, 쉼표같은 친구처럼

A코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귀포시가지와 서귀포 앞바다. 제주 강동삼 기자
A코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라산엔 구름이 산책하고 있어 백록담 정상이 안 보인다. 제주 강동삼 기자
말들의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솔오름 산책길. 제주 강동삼 기자

솔오름은 여느 오름들처럼 고사리철에는 고사리 채취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삼나무숲을 벗어나자 실제 고사리류과 식물들이 자라는 평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회갈색 말 두마리가 무심한 듯 풀을 뜯고 있었다. 마치 관광객이 된 듯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쏠’오름이 아니라 솔오름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 일각에선 몽골식 지명이라고 추론하기도 하고 살(피부)로 보기도 한다. 멀리서보면 매끈한 곡선미를 뽐내는 탓에 부드럽고 고운 살결이 드러나 제법 설득력이 있어보이기도 한단다.

출입통제되는 A코스와 B코스의 갈림길에서 시작된 가파른 나무계단을 헉헉 거리며 힘겹게 20여분 오르자 정상에 미악산 기지국이 나타난다. 제한구역으로 공무 외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오름을 오르는 기쁨 중 하나가 정상에서 만나는 시원한 제주바다와 서정적인 풍광인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솔오름에선 서귀포 시가지는 물론 범섬 새섬 문섬 섶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B코스 정상엔 해군제주기지 시설물이 마치 오름지기처럼 우뚝 서 있다. 군인복 무늬로 외벽을 치장한 모습이 누가봐도 국방과 관련된 시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건물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A코스 정상에 다다른다. 이곳은 B코스에서 못만났던 제지기오름과 지귀도까지 펼쳐진다. 뒤로는 한라산이 아쉽게도 구름에 가려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다.

자존감이 높은, 자기애가 강한 친구를 닮았다. 숲이었다가 평지였다가 다시 숲으로 변하는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는 친구와 대면한 느낌이다. 쭉쭉 뻗은 삼나무 숲속처럼 아늑하고 속깊은 친구, 가파른 숨을 몰아쉴 때쯤 쉼표같은 정자를 내어주는 친구, 편안하고 후덕한 인상으로, 때론 익살스럽고 천연덕스런 미소로 무장해제시키는 친구…

때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휴가가 될 수 있다. 꼭 멀리 가지 않아도 좋다. 가까운 친구와 차 한잔 하며 담소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휴가를 다녀오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마음의 안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소울메이트를 만난 느낌. 휴식같은 친구를 만난 느낌. 이날만큼은 솔오름이 ‘소울(Soul)오름’으로 다가왔다.

솔오름 초입 나무데크와 쉼터 테이블들. 제주 강동삼 기자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서귀포 칼호텔 그리고 쇠소깍

서귀포 KAL호텔에서 바라본 서귀포 바다, 그리고 문섬. 제주 강동삼 기자
서귀포 KAL호텔에서 바라본 동쪽 섶섬의 풍경.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올레길 6코스와 연결되는 KAL호텔 앞바다. 제주 강동삼 기자

솔오름을 내려와 주차장 인근 로터리 남쪽 푸드트럭에서 갈증을 풀기 위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전망대에 오른다. 외국의 휴양도시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국적인 풍광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서귀포 시가지 너머 섶섬과 문섬 사이엔 내가 머물 숙소인 KAL호텔이 아른거린다.

1985년 12월 29일 오픈한 칼호텔은 38년 역사와 전통을 지닌 호텔이다. 총 225개의 객실로 구성돼 연 130만명이 다녀가는 서귀포의 대표적인 호텔로 자리잡고 있다. 아마 서귀포에서 가장 빼어난 맛뷰를 자랑할 것이다. 나이가 지긋해진 만큼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도 함께 늙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오션뷰의 변함없는 모습에 친구들도 변함없이 찾아주는 듯 싶다. 초록초록한 넓은 정원과 야자수 너머로 코발트빛 바다다. 밋밋해질 수 있는 바다 왼쪽엔 섶섬이, 오른쪽엔 문섬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어쩌면 사람과 사랑은 변해도 한폭의 명작같은 풍경은 변하지 않기에 위안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그림에는 뭉크가 말하는 ‘약간의 햇빛과 흙먼지, 그리고 비’도 필요없다. 그만큼 청량하고 깨끗한 컬러의 그림이다. 뭉크의 그림 완성도를 더하는 약간의 흙먼지는 이곳에선 의미가 없다.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덧칠해져 아름다워지는 이미지가 아니듯. 덧칠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에 반한다.

어둠이 늦게 깔린 저녁 발코니에서 ‘바다멍’을 때린다. 존 메이스필드의 ‘바다가 그리워’의 시를 읊으며 ‘詩멍’ ‘쉬멍’하기도 한다. 학창시절 외워대던 시가 밀물듯이 다가온다. 밤이 깊어지자 고깃배가 호텔을 밝혀주는 듯, 어쩌면 호텔이 고깃배를 안내해주듯 공생공존하는 느낌이다.

‘나 다시 바다로 가련다/그 호젓한 바다 그 하늘로/내 바라는 건 다만 키 큰 배 한 척과/방향을 잡아줄 별 하나/그리고 바다 위의 뽀얀 안개와 뿌옇게 동트는 새벽뿐/.../나 다시 바다로 가련다/그 떠도는 집시의 생활로/갈매기 날고 고래가 헤엄치는/칼날 같은 바람부는 바다로/내 바라는 건 다만 낄낄대는 방랑의/친구 녀석들이 지껄이는 신나는 이야기와/ 오랜 일 끝난 후에 오는/기분 좋은 잠과 달콤한 꿈일 뿐’

서귀포시 하효동 쇠소깍에서 뗏목과 카누(조각배)를 타고 있는 관광객들. 제주 강동삼 기자
효돈천 담수와 하효바다으 해수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신비스런 계곡 쇠소깍. 제주 강동삼 기자

다음날 아침. 바다에 몸 담그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다시 관광객이 되어 보목바다를 지나 하효마을 관광지 쇠소깍으로 카누를 타러 간다. 1인당 1만원. 한번도 노를 잡아본 적이 없어 생경해 주저하는 순간, 매표소 직원이 한마디 한다. “출발해서 돌아올 땐 모두가 뱃사공처럼 베테랑이 돼서 돌아온다”고. 그 설득력 있는 말 한마디에 결국 노를 잡는다.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기암절벽의 쇠소깍과 그 위로 숲이 우거져 스릴과 어드벤처가 넘치는 영화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예전에는 가뭄을 해소하는 기우제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라 하여 함부로 돌을 던지거나 물놀이도 못하게 했단다.

쇠소깍의 바위에 비추는 물빛은 유난히 깊고 푸른 빛이다. 신분 때문에 사랑하던 남녀가 안타깝게 죽었다는 전설이 깊고 깊은 울림으로 전해져 온다.

제주 올레 5코스의 끝이자 6코스의 시작인 해수와 효돈천의 담수가 만나는 신비스런 계곡 쇠소깍에서 ‘쇠소’는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의 연못’을 뜻하고 ‘깍’은 끄트머리인 ‘마지막 끝’을 의미한다.

효돈천의 마지막 끝, 그리고 바다의 시작 지점. 해수와 담수가 밀물과 썰물에 섞이면서 그렇게 하나가 되고 있었다.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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