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못 갚겠으면 피부라도 잘라줘”···돈에 미친 도시에서 나온 혁신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8. 1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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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3] “돈, 오, 나의 돈! 나의 딸보다도 더 소중한 돈! 나의 황금과 보석을 위해 나는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겠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상인 샤일록은 돈이라면 자신의 영혼까지도 팔아넘길 위인입니다. 당대 유럽인들이 유대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악착같이 받아내는, 반(反)기독교적 인물. 샤일록은 기어이 채무자 안토니오에게 살 1파운드를 요구하다가 망신당합니다. 인간을 통찰하는 대문호조차 유대인을 향한 선입관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돈, 내 돈 내놓으라고.” 샤일록을 묘사한 토마스 설리의 1835년 작품.
‘베니스의 상인’은 문학사적으로도 그렇지만, 경제사적으로도 의미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베네치아(영어로 베니스)가 중세 유럽에서 최고의 경제 도시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도시국가가 동로마제국 약탈을 단행했을 정도니까요.

그 기반에는 상업을 기반으로 한 엄청난 경제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공공채권을 발행한 도시도 바로 베네치아였습니다. 베네치안은 어떻게 도시국가를 세계적인 경제도시로 만들었을까요.

아름다운 수상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진출처=Kent Wang]
도시국가 베네치아의 시작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겠다.”

동로마 제국의 명군으로 통하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서로마 제국 옛 땅을 수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이탈리아는 야만족인 반달족과 고트족의 놀이터로 전락해 버렸던 터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성지가 야만족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어서였습니다.

반달 왕국과 고트 왕국은 크게 성장해 이미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동로마제국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지요. 유스티니아누스가 535년 옛땅을 되찾기 위한 ‘고토회복 전쟁’에 나선 배경이었습니다. 약 20년의 전쟁 끝,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탈리아·북아프리카, 옛 로마가 전성기에 차지한 영토 대부분을 수복한 뒤였습니다. 그의 이름 뒤에는 이제 ‘대제’라는 명칭이 따라붙습니다.

“우리 폐하의 얼굴을 동전에 새기자.” 옛 로마영토인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뒤 만든 기념주화. [사진출처=Classical Numismatic Group]
동로마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베네치아
“이탈리아는 총독을 파견해 지배한다.”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땅에 ‘라벤나 총독부’를 설치합니다. 파견된 제국의 관리가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시스템. 베네치아 역시 라벤나 총독부를 통해 제국의 행정 시스템에 편입되었지요.

베네치아는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 도시로 성장합니다. 라벤나 총독부와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서 직접 통치가 힘든 구조여서였습니다. 늪지대를 개간해 도시를 만든 특수성도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자신의 도시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시민들이 직접 뽑은 ‘도제(Doge)’가 베네치아의 통치자가 된 이유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도제가 있는 도시는 제노바 외에는 베네치아가 유일합니다.

베네치아의 도제 궁. 시민들이 스스로 뽑은 권력인 도제가 사는 공간이었다. [사진출처=Matthias Süßen]
공화국으로 성장한 베네치아
명군 뒤에는 암군이 오기 마련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동로마 제국의 힘은 급격히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휘젓고 다녀도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응할 힘이 없었지요.

751년에는 라벤나 총독부가 무너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난민들이 베네치아로 흘러들었지요. 베네치아는 자주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세에 맞서 자치권에 대한 역량을 키워갔지요. 베네치아 공화국의 탄생이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제 샤를마뉴가 세운 프랑크 왕국이 베네치아에 눈독을 들였지만, 결코 넘어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력에 기대지 않는 국가는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간단한 국제사회의 명제를 베네치아가 증명하고 있던 셈이지요.

“그래 우리가 여기서 도시를 만드는 거야.” 베네치아 도시를 건설하는 이민자를 묘사한 12세기 그림.
무역을 도시의 업으로 삼은 베네치아
“무역만이 우리 베네치아의 힘이다.”

자립을 결심했을 때 국력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본인들이 지중해 무역 도시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각 도시에 물산과 사람을 나르고, 정당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유럽에서 무역을 하려는 이들은 모두 베네치아를 거쳐야 했습니다. 중동 레반트 지역부터 이집트 앞 홍해까지. 베네치아의 상선이 없는 곳이 없었을 정도입니다. 중국까지 여행해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폴로도 베네치안입니다.

“우리 베네치아인들은 여행과 무역(그리고 돈)을 참 좋아한다네.” 마르코 폴로의 모자이크.
지도자인 도제들은 공공의 부를 도시에 재투자했습니다. 베네치아에는 다리, 운하, 방벽, 요새, 아름다운 궁전과 같은 사회적 인프라가 매년 새롭게 건설되고 있었습니다. 무역을 통해 쌓은 항해 기술로 함선을 만들어 국방도 튼튼히 하곤 했었지요.
무역도시 베네치아. 15세기 삽화.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베네치아를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4차 십자군 전쟁 때인 1204년 베네치아 군사들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식민지국이 식민 모국을 점령해버린 전미문의 사건. 베네치아의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이슬람도 아닌 같은 기독교인에게..그것도 식민지 베네치아에게 당하다니... ” 베네치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외젠 들라크루아의 1840년 작품.
무역만큼이나 금융이 혁신한 도시
상업이 발달하려면 그 혈관 역할을 하는 금융가들이 있어야 하지요. 베네치아에는 많은 상인만큼이나 많은 은행가가 있었습니다. 도시의 중심 리알토 시장에는 은행가들이 나무 탁자에 앉아 돈을 융통해 줬습니다. 오늘날 은행을 뜻하는 영단어 ‘bank’는 고대 이탈리아어에서 나무 탁자를 뜻하는 ‘banco’에서 따왔습니다.
“돈 필요한 분들 이 방코(테이블)로 옵쇼~ .” 14세기 베네치아 은행을 묘사한 그림.
“시민들은 모두 베네치아 채권을 구매해야 합니다.”

베네치아 정부는 금융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실험을 단행합니다. 베네치아 정부 이름의 채권을 발행한 것입니다. 세계 최초의 ‘공채’ 였습니다. 채권은 일정 이자를 주고 돈을 빌리는 계약.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자기 신용을 이용해 국채를 발행하듯, 베네치아도 우량한 정부의 힘을 기반으로 돈을 민간으로부터 조달한 것이지요. ‘프레스티티’라는 이름의 공채가 처음으로 발행된 사건이었습니다.

베네치아가 긴급하게 돈을 조달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식민 모국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군사적 갈등이 임박해서였습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엘 1세는 1171년 베네치아 상인을 모두 수용소에 억류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단행했지요(후에 십자군으로 참전한 베네치아 군사들이 이슬람 국가와의 싸움 대신에 동로마 제국을 침략한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돈으로 전쟁을 치렀게.”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렴한 베네치아 함대. 이 엄청난 무력 공세의 배경에는 ‘국채 발행’이라는 혁명이 있었다.
국가의 명운을 든 전쟁 준비는 세금으로 감당되지 않았습니다. 도제 비탈레 미키엘 2세가 공채를 발행한 배경이었지요. 조건도 붙였습니다. 베네치아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 공채를 구매해야 한다는 것.

보유한 재산 규모에 따라 채권 구매량도 할당 되었지요. 매년 5퍼센트의 이자를 지급하기로 했지만 원금을 갚는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공채는 이렇듯 강제성을 띤 모습이었지요.

모든 베네치아인은 정부의 채권자가 된 셈이었습니다. 이 채권으로 조달한 자금 덕분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에 맞설 함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국채를 사고파는 2차 시장의 등장
“내 국채를 사겠나.”

베네치아 정부는 원금 상황을 차일피일 미뤘습니다. 지중해 국가간 갈등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서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베네치아 시민들은 자신들의 채권을 내다 팔기 시작했습니다. 2차 시장의 등장이었습니다.

“자 이곳에서 국채 바겐 세일~쿠팡보다 싸요~” 베네치아의 금융 핵심지인 리알토 광장.
베네치아의 미래를 밝게 보는 시민들은 채권의 값을 후하게 쳐줬고, 암울하게 보는 투자자들은 헐값이라도 팔아버렸지요.

실제로 베네치아 국채 채권값은 비교적 정치적 안정기였던 1376년까지는 액면가의 80~100%로 팔렸지만, 이후부터 1441년까지는 40~60%까지 떨어집니다. 빚에 허덕이던 베네치아 정부가 이자 지급을 연체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도시국가와 전쟁에서도 국채는 유효한 자금조달 수단이었습니다. 페라라와 전쟁에서도, 제노바와의 갈등 속에서도 밀라노와 결전을 벌일 때도 그랬습니다. 베네치아에서 이제 국채가 제도화되기에 이르렀지요. 미우나 고우나 베네치아 시민들은 이 국가가 잘 되기를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채가 휴지 쪼가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리알토 광장으로 연결되는 리알토 다리. [사진출처= Wolfgang Moroder]
반대에 직면한 베네치아 ‘국채’
“화폐는 교역에 쓰라고 존재하는 것이지, 이자를 낳으라고 만들어지지 않았다.”

베네치아의 국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수도승들이었습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건 기독교에서 엄히 금지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업권력과 교회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었지요. 유대인들이나 하던 일을 기독교 정권이 공공연히 벌이고 있다니요.

“이자를 받는자, 사탄의 자식이어라. ” 예수가 성전에서 고리대금업자를 몰아내는 장면.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작품.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의견과 국채라 하더라도 기독교 교리에 맞지는 않는다는 반박. 언제나 필요가 논리를 만드는 법입니다. 베네치아 국채 프레스티티를 인정하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지요.

14세기 철학자 니콜라스 드 앙글리아는 “프레스티티는 베네치아 시민이 강제로 사야하는 채권으로, 그 안에는 욕망이 들어있지 않다”고 옹호했습니다. 다른 채권과는 달리 봐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교회권력도 점점 ‘국채’를 인정하게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공공재정’으로 포장된 ‘국채’는 이제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은 정당한 금융행위로 자리를 잡게된 것이지요.

1571년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연합군의 결투인 레판토 해전에는 베네치아 군도 참전했다. 여러 번의 전쟁으로 베네치아 주정부는 국채를 발행할 필요성이 커졌다.
공화국은 사라졌지만 혁신은 영원하다
번영은 한때의 꿈처럼 아스라이 사라져갑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주도로 신항로가 개척되면서 지중해 바다는 중심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주도권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국채 발행도 이제 끝이로구나...” 마지막 도제 루도비코 마닌의 퇴위.
혁신은 그럼에도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시나브로 퍼져가기 마련입니다. 유럽의 모든 무역 도시들이 베네치아의 혁신을 도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걸 알게 됐지요. 새로운 자금 조달방법이 있다는 것을. 베네체아 공화국이 마지막 채권을 발행한 것은 1797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공화국을 점령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사라졌지만 국채는 이제 만국의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미국 국채 시장의 규모는 32조 달러로 추산됩니다. 세계 금융을 주도하는 미국 주식시장 40조달러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금융시장의 거대한 축이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 셈이지요. 이렇듯 금융의 역사는 번영의 역사입니다.

1976년 5000달러 규모 미국 국채.
<네줄요약>

ㅇ도시국가 베네치아는 국채를 최초로 발행한 나라로 꼽힌다.

ㅇ세금만으로는 인프라 구축· 전쟁 등 수 많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ㅇ조달한 돈으로 그들은 동로마제국의 수도까지 점령하기도 했다.

ㅇ금융혁신이 도시국가를 강대국가로 만든 것이다.

<참고문헌>

ㅇ윌리엄 N 게츠만, 금융의 역사, 지식의날개, 2023년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히스토리와 경제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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