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어떻게 유행어가 됐을까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8. 17. 06: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19세기 英 스마일스 ‘자조론’대표구절, 日서 유행한 후 조선 전파
19세기 스코틀랜드 작가 새뮤얼 스마일스. 개인의 성실과 노력을 강조한 '자조론'은 동아시아로 수입돼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퍼블릭 도메인

1923년 경성의 요릿집’국일관’에서 술취해 날뛰던 손님들이 이목을 끌었다. 고보(高普·고등보통학교) 교사들이 동료 생일을 맞아 한 턱 얻어먹는 자리였다. 당시 엘리트 지식인 대우받던 교사들이 좌우에 기생까지 거느리고 요릿집에서 술취한 채 떠들썩하게 모임을 갖던 게 눈총을 샀던 모양이다. 신문 가십성(性) 칼럼은 ‘살을 에는 듯한 밤 바람에 피곤한 몸을 옹숭거리고 ‘현미(玄米) 팡을 외오면서(?) 지나가는 고학생이 있을 것을 생각하였던가’라고 점잖게 나무랐다. 그런 후 ‘사랑가 흥타령에 정신을 잃고도 그 이튿날 아침에 스마일스의 자조론(自助論)이 여전히 나올 터이야!’하고 일갈했다.(‘잔소리’, 조선일보 1923년10월27일)

최남선은 1908년 신문관을 세워 잡지 '소년'을 발간하면서 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소개하고, 1918년엔 '자조론'을 번역 출간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도 '자조론'을 보완하는 원고를 매만지고 있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자조론’원고 만진 최남선

스마일스의 자조론은 19세기 스코틀랜드 작가 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1812~1904)의 대표작 ‘자조론’(Self-Help)을 말한다. 초반부에 나오는’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격언으로 유명한 책이다. 신문 칼럼에서 별다른 설명없이 언급할 만큼,스마일스는 당대 조선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다.

스마일스 ‘자조론’은 종종 신문에 등장했다. 3.1운동 여파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육당 최남선의 근황을 소개한 기사에도 등장한다. 육당을 면회한 인사를 취재한 이 기사는 ‘몸은 여전히 건강’하고 ‘얼굴도 별로 틀리지(다르지) 않았다’면서 육당이 ‘지금껏 역술중이던 스마일스 선생의 (자조론)을 그저께 20일까지 탈고를 하였다’고 전했다. 이 기사 제목은 ‘서대문 감옥 철창리에 자조론을 저(著)하는 최남선에 근상(近狀)’(조선일보 1920년6월22일) 이었다.

위암 장지연이 1906년 6월 창간한 계몽지 '조양호'창간호 첫페이지. 목차에 따르면, 앞부분에 '자조론' 1장을 번역한 글을 실었다. 위암은 '자조론'을 개인적 도덕이 아니라 망국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있는 방법으로 인식했다.

◇17년 노력으로 결실본 안악 고등보통학교

일제 때 중등학교 설립을 향한 지역민들의 염원은 뜨거웠다. 황해도 안악 지방에도 고등보통학교를 세우려는 운동이 1920년대 초반부터 불었다. 마침 경성에선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한창일 때였다. 문제는 50만~60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 마련이었다. 기성회를 만들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지방에서 쉽게 모을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10여년간 사업은 표류하다 1937년 가을 이 지역 김씨문중에서 절반인 30만원을 부담하겠다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기금 모집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나머지 절반도 확보했다. 이 소식을 전한 신문 기사는 ‘’하늘은 자조하는 자를 돕는다’고 한 스마일스의 명담은 그 진리를 잃지 않았던지 그 은인자중의 결과는 마침내 오고 말았다’고 썼다.(’孜孜營營 17년 해서(海西)교육 금자탑’, 조선일보 1938년1월1일)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71년 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소개한 '서국입지편-원본 자조론'을 출판한 나카무라 마나사오. 이 책은 1921년까지 최소 100만부 이상 팔려 근대 일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책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유학생 출신 나카무라는 이 책으로 '서유'로 불리기까지 했다. /퍼블릭 도메인

◇100만 부 이상 팔린 나카무라 ‘西國立志編’(자조론)

스마일스의 ‘자조론’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1년 영국 유학생 출신인 나카무라 마나사오(中村正直·1832~1891)가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원본(原本) 자조론’을 내놓으면서 대유행했다. 1921년초까지 해적판까지 합해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부강한 일본을 만든 2권의 책’중 하나로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대표적 저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입신 출세, 산업정신, 윤리 교육을 위한 국민 교육서로 받아들여진 이 책은 ‘서양논어’,나카무라는 ‘서유’(西儒) 로 불리며 구 사무라이층, 관리, 상인, 청소년과 노인 등 전 계층에 영향력을 미쳤다.(우남숙, ‘자조론 한국 근대’96쪽)

일본서 유행한’자조론’을 중국, 조선에 재빨리 전파한 이는 청말 개혁사상가 양계초(粱啓超·1873~1929)였다. 그는 1898년 광서제를 옹립한 ‘무술변법’(戊戌變法)개혁이 100일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요코하마에서 ‘청의보’(淸議報) ‘신민총보’(新民叢報)를 잇따라 발간하던 양계초는 ‘자조론’을 비롯한 서양 근대사상을 신문에 소개했다. 구한말 지식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개혁사상가였던 양계초의 논설은 신문, 잡지에 자주 등장했다.

1920년대 전반 최대의 번역가로 손꼽히는 난파 홍영후. 난파는 1923년 자조론을 번역한 '청년입지편'을 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홍난파까지 '자조론'을 번역할 만큼, 스마일스는 당대 인기있는 사상가였다.

◇위암 장지연의 ‘자조론’ 소개

덕분에’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유명한 격언은 일찍이 소개됐다. 위암 장지연이 1906년 6월 창간한 계몽잡지 ‘조양보’(朝陽報) 첫호는 스마일스(’수마이루수’로 표기)의 ‘자조론’1장 ‘국민과 개인’을 번역 소개했다.’천조자조(天助自助)란 차(此) 한 구절은 만인이 실험한 말이니 정확무의한지라. 자조자신의 정신은 즉 인간 진보의 근저니, 국민이 다수히 차(此) 정신을 체구하면 곧 그 국(國)의 세력이 용연히 발래(發來)하리라.’

장지연이 ‘조양보’를 창간하면서 ‘자조론’을 머리글로 내세운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단순히 서구 도덕철학을 흥미삼아 소개한 게 아니라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선의 국력(國力) 배양을 위한 목적이었다.’자조론’은 대한자강회 월보, 서북학회 월보, 공수학회보, 태극학회보 같은 구한말 계몽지에 잇달아 소개됐다.

◇’자조론’번역한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자조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는 육당 최남선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육당 최남선(1890~1957)은 1908년 출판사 신문관을 세워 본격적 출판계몽운동을 펼쳤는데, 그해 창간한 월간지 ‘소년’을 통해 스마일스의 ‘품성론’ 등을 여러 차례 소개했다. 최남선은 1918년 신문관에서 ‘자조론’을 발간했는데, 앞 기사에서 나온대로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도’자조론’을 보완하는 원고를 만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도 1923년 ‘자조론’을 번역한 ‘청년입지편’(박문서관)을 출간했다는 사실이다. 홍난파는 1920년 전후 가장 정력적으로 번역에 뛰어든 작가였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190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시엔키에비치 소설 ‘어디로 가나’,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축약한 ‘애사’, ‘장발장의 설움’, 등 중장편 9편을 번역해 단행본으로 냈고, 단편소설 2편을 번역해 잡지에 실었다.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를 쓴 김병철 교수는 난파를 김억과 더불어 ‘1920년대 최대 번역가’로 꼽을 정도다.

◇새마을운동, 천리마운동에까지 영향미친 ‘자조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론’의 인기는 광복 이후 남북한까지 이어졌다. 최희정의 연구(’한국근대화와 자조정신-남한의 새마을정신과 북한 자력갱생론의 연원’)에 따르면,’자조’를 내건 새마을운동과 ‘자력 갱생’을 내건 천리마운동의 연원은 구한말 이래 대유행한 스마일스의’자조론’까지 거슬러올라간다. 1930년대 피폐한 조선 농촌에 대한 대응책으로 조선총독부가 내건 ‘자력갱생론’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개인의 나태와 게으름이 빈곤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파탄난 식민 통치의 책임을 회피했다. 한걸음 나아가 관(官)의 지원덕분에 개인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있게 됐다는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장이다. 구한말 소개된 ‘격언’(格言) 하나가 지금껏 귓가에 맴돌만큼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경이롭다.

◇참고자료

‘자조론’, 조양보 창간호,1906년 6월

최희정, 한국근대화와 자조정신-남한의 새마을정신과 북한 자력갱생론의 연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9집, 2014년 여름

우남숙, 자조론과 한국 근대, 한국정치학회보 49집5호, 2015,12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을유문화사, 1975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바로가기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