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연꽃이 질 때쯤

곽아람 기자 2024. 8. 17.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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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아람 Books 팀장

성하(盛夏)에 피는 꽃은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청아한 건 연꽃이 아닌가 합니다. 창덕궁 후원에 핀 연꽃 사진을 들여다 보다가, 허난설헌의 ‘채련곡(采蓮曲)’을 읽었습니다.

“가을날 맑고 긴 호수는 푸른 옥 흐르는 듯(秋淨長湖碧玉流)/연꽃 가득한 곳에 작은 배 매어두었네(荷花深處繫蘭舟)/님 만나려 물 너머로 연밥 던졌다가(逢郞隔水投蓮子)/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 부끄러웠네(遙被人知半日羞).”

시 속 여인은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연잎 사이 깊숙한 곳에 쪽배를 숨겨두고 마음에 둔 이를 기다립니다. 저 멀리 그가 나타났지만 좀처럼 나를 봐 주지 않는군요. 님의 눈길을 내게 돌리려 용기 내어 연밥을 휙 던졌는데, 그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띄어 한참을 수줍어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플러팅(flirting)’, 즉 추파를 던지는 행위가 대담하네요.

중국 강남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연밥을 따서 주는 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의미가 있답니다. 예로부터 뭇시인들이 채련곡을 읊은 것은 흔하디 흔한 사랑 노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불러 보고파서겠지요.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당나라 이백의 채련곡이 특히 유명한데, 춘추시대 미인 서시의 빨래터였다는 약야계(若耶溪)를 배경으로 합니다.

“약야계 근방 연밥 따는 아가씨는(若耶溪傍採蓮女)/연꽃 사이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데(笑隔荷花共人語)/햇빛은 갓 단장한 얼굴 물밑까지 비추고(日照新妝水底明)/바람은 향기로운 옷소매 공중에 들어 나부끼네(風飄香袂空中擧)/언덕 위엔 뉘집 한량들인가(岸上誰家遊冶郞)/버드나무 사이 삼삼오오 어른거리네(三三五五映垂楊)/붉은말 울며 떨어지는 꽃 속으로 사라지니(紫騮嘶入落花去)/이를 보고 머뭇대며 괜히 애태우네(見此踟躕空斷腸).”

꽃 지고 연밥 영글면 이 더위도 꺾이겠죠. 이번 주말도 여전히 무덥겠지만, 마음만은 연꽃처럼 청량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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