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6·25 미군 포로들은 왜 中에 자발적으로 남았나
“중공군 포로로 잡혀 고문받고도
停戰 후 귀국 않은 건 ‘세뇌’ 때문”
세뇌의 역사
조엘 딤스데일 지음|임종기 옮김|에이도스|452쪽|2만5000원
1953년 6·25 정전협정 후 중공군에 사로잡혔던 미군 포로 21명이 귀국을 거부하고 중국에 남길 택했다. 미국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수용소에서 참혹한 고문을 받았던 자유민주주의 국가 장병들이 왜 공산주의 국가에 남기로 결정한 걸까? 그들은 변절자인가, 아니면 고문의 희생양인가.
정부, 학계, 언론계 등에서 뜨거운 논의가 이는 가운데 2차대전 당시 미 정보국에서 심리전 선전 전문가로 일했던 기자 에드워드 헌터가 포로들이 전향한 이유를 ‘brainwashing’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다. 중국어의 ‘시나오(洗腦)’를 영역한 이 말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헌터는 저서 ‘붉은 중국의 세뇌’에 이렇게 썼다. “세뇌는 자유세계의 정신을 파괴하여 자유세계를 정복하려는 무시무시한 공산주의의 새로운 전략이다.”
하버드 의대 교수를 지내고 현재 UC샌디에이고 정신의학과 석좌교수로 있는 저자는 중세 종교재판, 신흥종교 신도들의 집단 자살, 스톡홀름 신드롬, 현대 소셜미디어의 인간 심리 지배 등 세뇌의 역사를 추적한다. 이 중 6·25 당시 미군 포로들의 사례가 가장 흥미를 끈다. 연구자들로부터 6·25는 “적군이 포로들의 정신을 조직적으로 조작하려 시도한 최초의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포로들은 전쟁이 발발한 첫 3개월 사이 북한군에 생포돼 중공 수용소 도착 전까지 무자비한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했다. 운 좋게 살아남아 중공군에 넘겨지면 새로운 간수들이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주고 악수를 청했다. 저자는 잠깐 주어진 이 안도의 순간이 심리전 및 3년간 지속될 교화 과정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포로들에 대한 세뇌는 헌터가 책에 쓴 것처럼 “외부에 잔악 행위를 드러내지 않고 수감자를 살아있는 꼭두각시인 분별 없는 공산주의 자동인형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이었다. 처음에 포로들은 모의 처형, 유사 기아 상황, 수면 박탈에 시달렸다. 중공군은 모든 걸 빼앗은 후 뭐든 조금씩 주면서 반드시 감사를 표하게 만들었다. 장문의 자서전을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어떻게 쓰든 불충분 판정을 받고 다시 써야 했다. 아주 작은 내용의 불일치도 거짓말의 증거로 간주했다. 공산주의 소책자를 암기하고 토론하게 했다. 포로들을 모둠으로 나눠 그 안에서 자신과 서로를 비판하게 했고, 거부하면 독방에 감금했다. 이 결과 포로들은 세균전을 벌였다고 자백하고 반전 선전에 참여했다.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은 제국주의의 행태이며, 미국은 인종차별주의 국가라고 맹비난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포로들의 이런 행동을 자유주의 체제가 키워낸 ‘나약함’의 결과물이라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육군 정신과 의사인 윌리엄 E.메이어 소령이 “유약함과 진취성이 부족한 미국 교육, 과잉보호형 어머니 등이 포로들이 적군에 협력한 이유”라 짚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이 전향한 건 20세기 행동과학과 신경과학, 약리학이 크게 발전하며 꽃피운 ‘세뇌’ 연구의 결과물이라 주장한다. 그 바탕에 이반 파블로프의 유명한 ‘개 실험’이 있었다는 것. 러시아 국민을 표준화해 ‘새로운 소비에트 인간’을 빚어내고 싶었던 레닌은 조건반사를 연구하던 생리학자 파블로프와 손을 잡았다. 파블로프는 개 실험을 바탕으로 수면과 최면,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간의 ‘행동 교정’을 이끌어내는 방안을 연구했다. 이 연구는 이후 스탈린의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에도 이용된다.
1936~1938년 소련 대숙청 시기에 심문관들은 파블로프의 각본에 따라 죄수들을 설득했다. 죄수들은 자백하면 더 좋은 음식을 받았고, 더 좋은 감방에 수감됐다. 당원으로서의 양심과 가족에 대한 걱정을 건드렸다. 이 방법이 먹히지 않으면 몇 주간 독방에 감금하고 수면을 박탈했다. 인지 기능이 떨어진 죄수들은 구원받는 수단으로 처벌을 원했다. 수감자들은 자신의 삶을 광범위하게 비판하는 글을 작성해야만 했다. 이는 이후 6·25 때 중국에서 사용된 심문 기술의 예고편이었다.
에피소드 중심으로 기술돼 완결된 맛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순간에 심리적으로 취약해지는지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미군 포로들은 대부분 세뇌에 가장 취약한 나이인 10대 후반~20대 초반이었다. 저학력에 가정 환경이 불우한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명확한 적을 상대로 연합국과 함께 싸웠던 2차대전 때와는 달리 6·25 포로들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를 몰라 적에게 협조하는 일이 많았다고 분석한다. 결국 분명한 목표 의식이 정신력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원제 Dark Persu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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