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한국시간) 막을 내린 2024 파리 올림픽은 파격, 그 자체였다.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인 쿠베르탱 남작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열렸지만 전통보다는 변화와 혁신이 돋보인 대회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스포츠가 정치적 표현의 수단으로 쓰이는 걸 경계한다. 하지만 친환경·성평등·난민 등 사회적 아젠다를 담으려는 노력에는 앞장서고 있다.
이번 대회 최대 화두는 ‘저탄소 올림픽’이었다. 파리 조직위원회는 선수촌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고, 선수 이동버스도 에어컨을 작동하지 않았다. 창문도 열리지 않는 찜통 버스에 선수들은 짐짝처럼 실려다녔다. 선수촌 식단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비용 절감 측면에선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선수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태권도 이대훈 해설위원은 “선수들이 컨디션 관리하는 데 매우 힘들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어두운 뒷면도 있었다. 친환경을 부르짖었지만, 선수단이 입장할 때 사용한 배는 디젤 엔진을 사용한 ‘구식’이었다. 경기장 식음료대에서 판매하는 음료는 플라스틱이나 유리병에서 꺼낸 뒤 플라스틱 컵에 담아 건네줬다. 컵을 돌려주면 ‘환경 부담료’ 2유로(약 3000원)를 환불해줬지만, 1000만개 넘게 소비됐다.
올림픽은 과거에 비해 젊어졌다.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열린 브레이킹과 3×3 농구 경기장엔 연일 많은 관중이 몰렸다. 박진감 넘치는 선수들의 움직임과 음악이 어우러져 파티 분위기를 냈다. 현장 중계에 나선 양궁의 기보배 광주여대 교수는 “IOC는 젊은 세대가 주목하는 종목들을 늘리기 시작했다. 도쿄 올림픽의 스케이트보드, 3×3 농구, 사이클 BMX 프리스타일에 이어 파리에서 첫 정식종목이 된 브레이킹이 방증”이라고 말했다.
에펠탑 아래 꾸며진 비치발리볼 경기장은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관중들은 경기도 즐기고 야간 경기가 끝난 뒤엔 에펠탑이 화려하게 조명에 빛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며 즐거워했다.
1900년 지은 박람회 전시관도 깜짝 변신
펜싱과 태권도 경기가 열린 그랑 팔레 역시 호평을 받았다. 1900년 세계박람회를 위해 지은 전시관에 대규모 가변석을 설치했다. 웅장한 음악과 화려한 등장, 대형 스크린을 통한 비디오 리플레이를 활용해 관중과 선수가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했다. 기보배 교수는 “코로나 팬데믹을 힘들게 이겨낸 직후의 대회인 만큼 관중들의 열기는 더 뜨겁게 느껴졌다. 활을 내려놓은 나도 다시 올림픽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 깊었다”고 했다.
패션의 나라답게 개·폐회식 연출은 감각적이고 독특했다. 음악과 조명, 사전 촬영 영상을 활용해 한 편의 오페라나 영화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선수들은 화려하면서도 중량감이 큰 메달 디자인에 만족했다. 이번 대회 메달은 루이비통의 주얼리 브랜드 쇼메가 도안을 맡았다. 기보배 교수는 “지금까지 내가 본 메달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바다나 강물에 햇빛을 받은 윤슬과 같은 반짝임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고 했다.
대회 최고 스타는 개최국 프랑스의 수영 영웅 레옹 마르샹(27)이었다. 마르샹은 이번 대회 최다인 4관왕에 올랐다. 특히 금메달을 따낸 4개 종목 모두 올림픽 기록을 세웠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의 개인혼영 200m 기록을 깨트린 장면이 압권이었다.
남자 펜싱 사브르 단체전 결승 도중 프랑스 관중들이 마르샹의 금메달에 환호하며 그의 이름 “레옹”을 외쳐 경기가 중단되는 소동도 있었다. 사브르 대표팀 구본길은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라며 웃었다. 마르샹은 폐회식에서도 성화를 들고,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 5대륙 및 난민 대표 선수와 함께 입김으로 불을 끄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한국 메달 딴 44명 중 24명 밀레니얼 세대
한국 선수단에서는 젊은 선수들이 맹활약했다. 44명의 메달리스트 중 절반이 넘는 24명이 2000년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다. 이들은 겁이 없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10살 차이가 나는 후배들과 함께 땀 흘린 구본길은 “국가대표로 17년을 지내는 동안 많은 후배들을 봐왔다. 시간이 갈수록 달라진다. (도)경동이가 8강전 도중 ‘내가 언제든 뒤에서 나갈 테니까 자신 있게 뛰라’고 하더라. 후배에게 듣기 어려운 이야기다. 내가 후배라면 감히 하지 못했을 말”이라고 했다.
이대훈 해설위원은 “우리 땐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지도자에게 질문도 잘 못했다. 요즘 친구들은 당돌하게 ‘저 무조건 1등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이런 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 물론 긴장하고 중요한 경기를 앞두면 도움을 요청하지만, 긴장감을 털어내는 속도가 아주 빠르다. 때로는 부러울 정도다. 젊은 선수들이 많은 메달을 딸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과제도 남겼다. 대한배드민턴협회와 갈등을 빚은 안세영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종목 단체와 선수의 처우, 환경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기보배 교수는 “‘누가 잘했냐, 못했냐’의 이분법적 사고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라고 전제했다. 그는 이어 “효율 측면에서 조직의 지원과 규율이 성적 향상을 이끈 건 사실이다. 다만 젊은 선수들의 지향성과는 간극이 있다. 스포츠와 학계,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앞으로 심도 있게 다뤄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