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섬 오랑캐가 팔도를 삼켰다" 고종은 글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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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기록에 남은 구한말 군주의 절규
지도자, 그것도 국가 원수면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심성 도야를 앞세운 유교 왕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필자는 고종 시대를 공부하면서 군주 고종의 절규와 통곡을 세 번 만났다.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참지 못한 통곡들이었다.
(1) 1884년(고종 21) 10월 17일(음력) 밤 우정국 낙성식 연회에서 우영사(右營使) 민영익이 흉도들이 휘두른 칼에 크게 자상을 입었다. 가해 측의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창덕궁 궐내 왕의 침전으로 가서 변고를 알리고 이웃 경우궁(景祐宮, 현 현대그룹 사옥 자리)으로 거처를 옮기셔야 한다고 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도 김옥균의 연락을 받고 호위를 이유로 병사를 거느리고 이곳으로 왔다. (2) 이튿날 경우궁에서 김옥균 등이 사관생도와 장사들을 시켜 좌영사 이조연 등 대신 6명과 내시 유재현을 (대문 쪽) 앞 건물(前堂)에서 들어오는 대로 죽였다. 임금께서 “연거푸 죽이지 말라! 죽이지 말라!”라고 외쳤다.
좌영사 이조연, 후영사 윤태준, 전영사 한규직, 좌찬성 민태호, 지중추부사 조영하, 해방총관 민영목 등 6인은 거짓 왕명을 받고 입궐하다가 살해되었다. 1874년 고종은 친정에 나설 때부터 친위군 양성에 뜻을 두어 무위소(武衛所)를 세웠다. 무위소 군사들에 대한 우대는 기존 5군영 군사들에게 박탈감을 주어 1882년 6월 대원군이 그들을 충동하여 군란을 일으키고 무위소는 혁파했다. 고종은 갑신정변 두 달 전에 중앙 군영 전체를 재편성하여 4영(營) 체제로 만들었다. 4영 책임자 중 3명이 피살되고 1명이 죽을 뻔했다.
갑신정변, 개화·수구 대립은 일본 주장
지중추부사 조영하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로 조대비가 고종을 왕위계승자로 지명한 뜻을 받들어 조정에서 후견인 역할을 했다. 좌찬성 민태호, 해방총관 민영목 등은 우영사 민영익과 함께 왕비 민씨 측 사람들이다. 고종은 군란 후 왕권의 안정을 위해 왕비 집안 출신들도 중용하여 조대비 측 인사들과 연대토록 하였다. 어느 쪽이나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 설립 후 외국과의 교섭 업무 요직 담당자들이었다. 김옥균은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고, 일본공사관 측은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해 그를 도왔다. 무슨 목적일까? 갑신정변이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란 설명은 1910년 강제 병합 후에 일본 측이 만들어 낸 것이다. 피해자들도 모두 ‘개화’ 업무에 종사하였으니 ‘수구파’로 몰 수 없다.
김옥균은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훈련원(현 동대문운동장)에 주둔한 것을 보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찾아가 병력을 지원해주면 이들을 내쫓는 정변을 일으키겠다고 했다. 다케조에 공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1882년 현재 일본은 청국과 겨룰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김옥균은 1881년부터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 지원을 받는 개화에 관심을 가졌다, 고종 정부가 비중을 둔 청국의 양무운동 모델의 근대화 사업이나, 1882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된 미국과의 수호 통상조약 체결 및 미국을 다녀오는 보빙 사행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김옥균은 일본 쪽에 서 있었다. 철종 부마 박영효는 1883년 수신사 왕래 경력으로 김옥균의 제안에 동조했다가 뒷날 크게 후회했다. 보빙사행 부사로 미국을 다녀온 홍영식은 정변 종반 국왕 호위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으나 와중에 사망했다. 1884년 현재 정부의 주 외교 노선 바깥에 처한 김옥균은 군란으로 어지러워진 정국에서 일본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아보려는 야망에 차 있었다.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1883년 미국 정부가 조선 보빙사를 극진히 우대한다는 보고를 받고 다케조에 공사를 소환해 김옥균에게 지금 전날 말한 대로 정변을 일으키면 도울 것을 약속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조선에 우호국으로 자리 잡으면 저들의 ‘주변국 선점 정책’을 조선에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을 우려했다. (중앙SUNDAY 2023.12.02.) 일본은 친청에서 친미로 전환하는 고종 정부의 외교정책 중심인물들을 제거하여 대미 외교에 타격을 가하고자 김옥균을 돕기로 했다. 일본은 1개 중대 병력 지원으로 목적을 달성 한 후 3일 만에 미련 없이 서울을 빠져나갔다. 김옥균 일당은 철저하게 일본에 이용당하였고 고종은 눈앞에서 6 대신을 살해한 김옥균을 끝까지 용서할 수 없었다.
황후는 나에게 대간(大奸)은 요순도 미리 알기 어려운 것으로 간사한 짓은 의심이 날 때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뒷날의 화를 키우는 것이 된다고 했다. 내가 황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 정병하 네 역적을 제때 처단하지 않아서 끝내 저들이 외국 군사를 불러들여 천하 만고에 없는 큰 변란을 당하고 말았다. 아~ 짐이 황후를 저버렸다. 짐은 황후의 몸을 궁 안에서 지키지 못했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렸다. 지금 슬퍼하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니 회한이 그치지 않는다.
처절한 통곡의 소리다.
세 번째는 1909년 3월 15일 고종이 태황제로서 내린 국권 이양 칙유(勅諭)이다. 고종황제는 1905년 11월 ‘보호조약’을 강제당한 뒤 그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3특사를 파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통감 이토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고,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토는 유화정책으로 신 황제(순종)를 앞세워 기차로 지방 행차 곧 순행(巡幸)을 시행했다. 그러나 기차가 머무는 곳에 황제를 맞이하는 수만, 십만을 헤아리는 인파가 모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보호국 정책이 실패한 것을 자인했다. 2월 10일, 순행 종료 1주 만에 이토는 통감 사임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동안 ‘병합’을 주장해온 군부에 한국 통치권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그가 서울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인 3월 15일 고종은 태황제의 이름으로 ‘서북 간도와 부근 각지 민인(民人)이 있는 곳에 고함’이란 글을 내렸다. 고종은 이 글에서 “슬프다!”라는 말을 세 번 앞세웠다.
“슬프다! 짐이 지워진 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렇게 낭떠러지에 떨어졌다. 나 한 사람의 죄로 후회해도 다할 수가 없다. 짐이 참으로 부덕하니 너희 만성(萬姓)이 누가 나를 믿고 따르겠는가? --- 슬프다! 짐의 상심이 심하여 차마 말을 못 하겠다. 꿈틀거리던 섬 오랑캐가 긴 뱀이 되고 큰 멧돼지가 되어 우리 팔도를 삼키고 또 흉도가 이들에 붙어 너희 만성을 짓밟고 으깨어 절단하였다. 슬프다! 짐의 얼굴이 두껍고 겸연쩍다. 짐이 제왕이 아니던가. --- 망했다고 말하지 말자. 너희 만성이 있느니라. --- 이 나라는 나 한 사람의 대한이 아니라 너희 만성의 대한이다. 독립이라야 나라(國)며, 자유라야 민(民)이다. 나라는 곧 민이 쌓인 것이며 민은 선한 무리(善群)다. 오호라! 너희는 지금 하나가 되어 심력을 우리 대한 광복에 써서 자손 만세가 영원히 의지토록 하라. 너희 몸을 튼튼히 하고, 너희 피를 뜨겁게 하고, 너희 배움을 닦아 그 그릇이 차거든 때를 기다려 움직이라. 함부로 덤비지 말고, 게을리 늘어지지 말며, 너무 나서지도 뒤지지도 말고, 기회를 적중시키되 반드시 도전하면서 --- 마지막에 큰 공훈을 세워라. 오호라! 어찌 내가 너희를 일깨운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짐은 참으로 부덕하다. 개국 517년 3월 15일 태황제” (현대문으로 옮김)
국가원수로서 국권 상실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면서 여러분이 국민으로서 덕·체·지의 3양(養) 교육을 닦아 국권을 되찾아 달라는 간절한 호소다.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이 되고 있었으며 그 ‘국민’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장 예행 날, 전 국민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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