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광복절에 이 소동을 벌이는가
헌법 前文에
‘建國節’ 비집고 들어갈 틈 없다
이승만·김구 長點 합하면
독립·발전 動力,
결점 부풀리면
김일성 一族 도울 뿐
광복절(光復節) 속 ‘광복’은 ‘잃었던 나라를 되찾다’라는 뜻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본 식민 지배의 노예 상태에서 풀려났다. 그 첫 선물은 일본식(日本式) 이름을 버리고 우리 본래의 성(姓)과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다. 총독 미나미(南次郎)는 1939년 조선인은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름을 고치지 않으면 자녀의 학교 진학·취직은 물론 생필품 배급 중단과 우편물까지 배달하지 못하게 하는 강제 수단을 동원했다. 1941년 말 전체 가구(家口)의 81.5%인 322만 가구가 일본 이름으로 바꿔 신고했다.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8명은 일본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8월 15일은 해방의 날이자 우리가 근대적 헌법과 국민·영토·주권을 가진 온전한 독립 국가가 됐음을 세계에 선포한 날이기도 하다. 1948년 5월 10일 나라의 기본 틀인 헌법을 만들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제헌(制憲)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21세 이상 유권자 813만명 중 784만명이 투표소에 나갔다. 198명이 뽑힌 이 선거에서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두 곳은 남로당의 폭력 방해로 투표가 이뤄지지 못했다.
5월 31일 개원(開院)한 제헌 국회는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승만은 개회사에서 “기미년(己未年)에 결사(決死) 혈투(血鬪)한 정신을 본받아 최후 1인 최후 일각까지 분투하자”고 다짐했다. 기미년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해다.
제헌 국회는 개원 다음 날 헌법기초위원회를 꾸려 헌법 초안 작성에 매달렸다. 기초위원회는 제헌의원 30명과 유진오(훗날 고려대 총장)를 비롯한 10명의 전문가로 구성됐다. 기초위원회는 이승만 의장의 당부대로 ‘3·1운동 당시의 결사·혈투 정신’으로 전문(前文)과 10장 102개 조항으로 된 헌법 초안을 완성해 6월 22일 제헌 국회 본회의에 넘겼다. 제헌 의원들은 트럭 화물 칸에 판자를 깔고 아침 10시 출근해 자정 무렵까지 손바닥만 한 걸상에 5명씩 붙어 앉아 단어 뜻 문장 뜻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이러는 사이 동유럽 좌우(左右) 합작 정부는 스탈린 지령에 따른 쿠데타로 낙엽 떨어지듯 무너졌고 중국 대륙에선 쫓기던 마오쩌둥(毛澤東)이 거꾸로 장제스(蔣介石) 정부를 벼랑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나라 안에서 남로당은 도시 폭동·군사 반란·산악 게릴라 활동을 강화해 정부 없는 나라를 뒤흔들었다. 이런 내외(內外) 정세 속에서 ‘헌법 만들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제헌 의회의 헌법 심의는 먼저 각 조항을 다루고, 머리말인 헌법 전문(前文)을 맨 나중에 심의하는 역순(逆順)을 밟았다. 나라의 이름 곧 국호(國號)조차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헌 국회 의원 발언을 옮겨 적은 속기록(速記錄)을 토대로 한 ‘헌법의 순간(저자 박혁)’을 잠깐만 훑어도 제헌 의원들의 애국심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헌법 속 한 조항 한 단어도 소홀히 넘기지 않고 맹렬한 토론을 벌였다. ‘대한민국’ ‘고려’ ‘조선’ ‘새한’ 등 여러 국호 후보 가운데 대한민국을 선택한 과정도 진통의 연속이었다.
엊그제 광복절 경축 행사가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정부 주관 행사와 광복회·야당 행사로 두 조각이 난 배경은 헌법 전문과 직접 관련이 있다. 제헌 의회가 헌법 전문을 심의할 때 이승만 의장은 사회를 신익희 부의장에게 맡기고 의석에 앉아 있었다. 이 의장이 손을 들고 신 부의장에게 발언권을 신청하자 의석이 조용해지면서 모두가 그를 지켜봤다. 이승만의 역사적 발언은 이랬다.
“헌법 전문에 ‘우리 대한민국은 기미년 3·1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을 ‘재건(再建)’하기로 함’을 넣었으면 합니다. 우리 앞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3·1혁명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헌법 맨 꼭대기에 이 문구를 넣어야 합니다.”
이 발언 가운데 ‘3·1혁명’이 ‘3·1운동’으로 바뀌어 이승만의 간절한 바람대로 여러 차례 헌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헌법 맨 꼭대기를 지키고 있다. 이승만의 발언 어느 틈새에 왜색풍(倭色風)의 건국절(建國節) 발상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정말 그런 세력이 있다면 헛꿈을 깨야 하고, 있지도 않은 헛것을 보고 소스라쳤다면 찬물에 얼굴을 담글 일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과 김구는 서로 상대방에게 없는 것을 갖췄던 거인(巨人)이다. 이승만은 세계 정세를 굽어보는 통찰력으로 독립운동과 독립 후 대한민국을 번영의 길로 선도(先導)했다. 김구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궂은일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독립 정신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지켜냈다. 양쪽 모두 결점도 있는 인간이었다. 장점을 합하면 나라의 보물이다. 반대로 결점을 부풀리면 북한 동포를 노예로 부리는 김일성 일족(一族)에게 이득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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