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한국, 중진국 함정 극복한 모범사례 맞나?

2024. 8. 17. 00:1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
글로벌 지정학적 불안과 국제 금융시장 충격파로 어우러진 이번 달이었다. 이스라엘-이란 충돌과 러-우크라 전쟁 확산이 초읽기에 들어갔고 글로벌 증시는 폭락과 반등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미국 경기침체 우려로 ‘R의 공포’가 되살아났고 주요국의 통화정책 기조 변화(피벗)에다 초박빙 구도로 바뀐 미국 11월 대선까지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증폭되는 시기를 맞았다. 대외 정치·경제 환경변화 시기일수록 국가의 경쟁력과 복원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 싱가포르, 선진국 진입에 성공
청렴·혁신·금융 경쟁력이 비결
우리도 상속세 등 세제 개혁 시급
‘25만원 지원’ 포퓰리즘 벗어나야

선데이 칼럼
이런 가운데 최근 발간한 세계은행(WB)의 개발보고서가 눈길을 끈다. 한국이 이른바 ‘중진국 함정(middle-income trap)’을 성공적으로 벗어난 모범사례로 소개됐는데, 15년이란 오랜 시간을 워싱턴 DC 소재 세계은행에서 보낸 필자에게 감회가 적지 않았다. 한국이 세계적 ‘성장의 수퍼스타’라는 격찬에 우리 국민으로서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만했다. 그렇더라도 세계은행 통계 기준상 중진국을 넘어 고소득(high-income) 국가로 올라선 건 맞지만 정치의식과 정책의 선진화는 별개의 문제다.

글로벌 증시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아직도 MSCI 신흥국(EM) 지수에 머물고 있고 그나마 EM 지수 내 비중은 중국·인도·대만에도 밀리는 수준이다. 지난 대선의 이슈였던 MSCI 선진국 지수로의 승격도 여전히 공회전하고 있다.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선진국 지수에 포함된 나라는 일본·호주·싱가포르 정도다. 세계은행 보고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진정한 선진국 진입은 서두르되 중진국으로의 역주행은 막으라는 경고로 들린다.

중진국 함정을 벗어난 후 선진국 클럽 가입까지 초고속 성장에 성공한 나라로는 싱가포르가 꼽힌다. 싱가포르의 경제 규모는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미국보다 높은 9만1000달러로 한국의 3배에 달하는 선진국이자 세계 굴지의 금융·통상 허브 국가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직후 1966년 세계은행에 가입해 1975년 차관 공여 대상국에서 조기 졸업한 우등 국가다. “자유는 질서 속에서만 존재한다”라는 리콴유 초대 총리의 지론대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로 성장했고 금년도 세계경제포럼(WEF)의 글로벌 경쟁력 평가에서 1위로 올랐다.

싱가포르의 선진화 드라이버는 세 가지다. 첫째, 청렴하고 강력한 리더십이다. 자유시장경제와 엄격한 법치를 접목한 성장 전략을 과감하게 추진한 통치 체제에 엇갈린 시각도 존재하지만, 리콴유의 비전과 통치 철학 없이는 오늘날의 싱가포르도 없었다. 그의 자서전 『일류 국가의 길』에서 강조한 싱가포르의 국정 기조는 미래 지향적 실용주의 국가전략이다. 둘째, 혁신을 통한 산업경쟁력 강화와 지속적 개혁 노력이다. 변화와 혁신의 아이콘인 복합리조트 마리나베이샌즈는 마이스(MICE, 국제회의·관광·컨벤션 등) 산업의 새로운 메카로 부상하면서 물류 중심에서 세계 굴지의 국제화 도시로 거듭났다. 셋째, 세계 최고 수준의 금융 서비스 경쟁력이다. 파격적 규제 완화, 과감한 해외 투자 유치, 영어 공용화, 유연한 노동시장과 전문인력 육성을 통한 금융허브 전략은 싱가포르 성공 모델의 요체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 경험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도 경제 역동성 제고와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인적자본 투자 확대, 혁신성장 가속화, 노동·금융 효율성 제고 등 경제 체질 개선은 필수라는 교훈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기업의 혁신과 도전을 가로막는 구시대적 규제 혁파와 국내 기업의 투자를 늘리고 해외 이탈을 막기 위한 상속세 인하 등 세제 개혁은 시급한 과제다.

‘선진국 따라잡기’ 못지않게 중요한 건 ‘역주행 피하기’다. 앞으로 달려야 할 시점에 뒤로 후진하는 국내 정치권 모습을 보면 우리가 과연 중진국을 넘어섰는지 의문이다.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을 밀어붙이는 절대다수 야당의 포퓰리즘 법안은 중진국인 태국이 거센 비판과 논란 속에서 이달 도입한 16세 이상 국민 5000만 명에게 1만 밧화(약 39만원)를 주는 프로그램을 꼭 빼닮았다. 태국은 1인당 GDP가 7000달러(한국의 5분의 1) 수준인 데다 계속된 정치적 혼란으로 성장이 정체돼 있다. 그나마 태국식 현금 살포는 경제의 디지털화 촉진을 위해 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통화를 ‘디지털 지갑’으로 지급한다니 야당 주도의 지역 상품권보다 기술적으로는 한 수 위다. 고질적 재정적자로 선진국 문턱에서 뒷걸음친 남미나 남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포퓰리즘 유혹을 떨치고 재정 지출의 효율성 극대화 원칙을 지켜야 한다.

한국의 1인당 GDP가 사상 최초로 일본을 넘어선 올해 맞이한 광복절, 뜬금없는 건국절 논란과 친일 몰이 구태는 참담하다. 신냉전 시대의 국제질서 변화와 인공지능(AI) 주도 4차 산업혁명의 역사적 변곡점인 급커브 길에서 백미러 보고 달리겠다니 가당치 않다. 지난날을 잊어서도 안 되지만 과거에 매몰된 국가의 미래는 없다. “나는 네 나라(영국·일본·말레이시아·싱가포르) 국가를 부르며 살아왔다”라는 리콴유 어록은 아픈 역사를 국가의 미래 동력으로 승화시키라는 뜻이다. 지금은 명실상부한 선진 대한민국을 앞당기는 데 국민적 역량을 모아야 할 때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