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상대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요즘 행태와 극한 정쟁을 보면서 지금이 마치 1945년 해방 직후란 착각이 들 정도다. 해방정국에는 김구·여운형·장덕수·송진우 등이 암살되는 비극이 잦았다. 지금은 총만 들지 않았을 뿐 세 치 혀로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고야 말겠다는 극단적 태도는 결코 덜 험악하지 않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을 역임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8·15에 맞춰 출간한 『해방정국의 풍경』을 2024년 현실과 비교하며 읽으면 소름이 돋을 것 같다. 해방정국은 한국 현대사에서 이념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다. ‘인물로 돌아보는 대한민국 현대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이승만·김구·김일성·박헌영 등 한국 현대사를 풍미한 우익·중도·좌익을 대표하는 인물들 사이에 일어난 일화와 사건을 상세히 소개했다. 치밀한 분석과 색다른 접근으로 격동의 시대에 담긴 진실과 이면을 그려냈다.
저자가 글머리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강단과 논문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비사와 슬프고 아름답고 추악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역사학의 주류 논쟁에서 조금 비켜서서 교과서나 연구서 또는 강의실에서 말할 수 없었던 해방 정국의 모습을 담았다. 따라서 책을 읽는 독자들은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거북한 부분을 만날 수도 있을 듯하다. 실제로 주간지 연재 당시 좌우 모두가 비판했다.
아날학파(Annales School)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저자는 “소소한 이야기도 역사가 될 수 있고 일상의 삶을 떠난 역사는 공허하다”고 강조한다. 32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해방정국을 심층적으로 해부한 이유에 대해 “왜 해방정국이 파열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대사의 비극은 결국 사람이 저지른 업보였고 그 가운데 일부만 우발이론(contingency theory)으로 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이 독립변수이고 이념·체제, 강대국의 입김은 종속변수였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그는 망국과 일제 식민지배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지금의 암울한 현실의 밑바닥에는 분단이라는 업장(karma)이 깔렸다고 주장한다.
이승만과 김구는 해방정국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이승만과 김구가 갈등하게 된 첫 사건은 통속적이게도 돈 문제였다고 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저자는 “일부 김구를 숭모하는 사람은 ‘이승만이 김구를 죽였다’고 내놓고 말하고 있고, 이에 질세라 이승만 측에서는 ‘김구가 장덕수와 여운형을 죽인 것’으로 믿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 이승만이나 김구의 숭모자들이 해야 할 일은 내가 법통이니,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를 두고 다툴 것이 아니라 그 양쪽 후손들이 먼저 화해하고 좌익에 대해 항거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흔히 해방정국의 갈등을 설명하면서 좌우익 이념 갈등이 비극을 낳았다는 것이 주류적 진단이다. 하지만 저자는 좌익 내부의 갈등과 우익 내부의 갈등이 좌우익 사이의 갈등보다 더 심각했다고 주장한다. 진영 내부 갈등이 더 적의(敵意)에 차 있었고 잔혹했는데, 이것이 해방정국을 더욱 비극의 길로 몰아갔다는 진단이다.
그에 따르면 대개 우익은 우익의 손에 죽었고 좌익은 좌익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를 저자는 같은 이데올로기 집단 내부에서 중도 온건 노선을 배신이나 변절 또는 기회주의자로 보려는 극단적 도그마, 그리고 성숙하지 않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해방정국에서 이념이나 노선 문제는 당사자들이나 후세 사가들에 의해 과장됐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가 해방정국을 재조명한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그래서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려는 소박한 소망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은 해방 70주년에 한 주간지에 연재를 시작해 2017년 단행본으로 출간한 내용을 보강하고 업데이트했다. 특히 농지개혁을 주도한 죽산 조봉암 선생을 추가한 것이 눈에 띈다. 이 개정판은 중앙일보의 프리미엄 디지털 구독 서비스인 더중앙플러스에 연재 중이다.
내년은 해방 80주년. 저자의 바람처럼 독자들도 해방정국을 돌아보며 대한민국이 과연 극한 정쟁을 되풀이할 것인지 자성하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