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모차르트' 생상스, 어쩌다 음악계 보수 아이콘?

2024. 8. 1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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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공연을 펼치겠다고 했던 프랑스 올림픽 위원회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2024 파리 올림픽 개막행사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예술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라고 할까. 파리의 다리, 강변, 지붕 위를 오가며 연출된 공연들은 프랑스 역사와 도시를 전면에 부각함으로써 프랑스의 문화적 성취와 파리만의 매력을 한껏 뽐냈다. 음악에서는 장 필립 라모, 모리스 라벨, 카미유 생상스, 에릭 사티 등 프랑스가 배출한 걸출한 클래식 거장들의 작품이 공연 내내 흘렀다. 자국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무대였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에도 음악의 암흑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후반까지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 왕정복고, 제2공화국, 쿠데타, 제2 제정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격변의 시대였으니 예술 활동이 위축되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옆 나라 독일은 오히려 화려한 비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프랑스 음악가들이 안일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예술의 중심이라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파리가 외국 인재 음악가들의 활동 무대가 되는 것으로 만족했으니 말이다.

서양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이 당시 독일 음악가들에 의해 새로운 틀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흐는 18세기 전반 당시 독일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던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을 흡수해 독일음악의 전통을 처음 수립하였고, 헨델은 독일인으로 태어나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명성을 얻으며 성공한 음악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편 이들의 영향을 받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제국의 수도 빈에서 음악의 형식과 구조를 확립시키며 기악을 추상 예술의 정수로 끌어 올렸다.

독일 작곡가들 위업 부정, 배타적 성향
프랑스의 음악적 자부심의 대명사로 통하는 카미유 생상스(1835~1921).
음악의 헤게모니가 독일어권 음악가들에게 넘어가는 동안 프랑스인들은 유럽 전역에서는 고사하고 프랑스 안에서조차 독일음악이 자국의 음악보다 훨씬 즐겨 연주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이들은 보불전쟁의 패배 이후 비로소 냉엄한 현실을 깨달았고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위대한 음악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는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30대의 천재 음악가 카미유 생상스가 있었다.

생상스는 로맹 뷔신과 함께 프랑스 국립음악협회를 설립했는데, 당시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을 포함하여 창립회원만 150명에 달했다. 국립음악협회의 목적은 프랑스 음악의 부흥과 그 우월성을 상기시키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음악처럼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예술 분야에서 무엇이 프랑스 음악인지 그 정체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협회는 일단 작곡가가 프랑스 국적인 곡들과 프랑스를 위해 프랑스 땅에서 작곡된 작품들을 프랑스 음악으로 간주해서 그 출판과 연주를 독려하기로 한다.

국립음악협회의 회장을 맡은 생상스에게는 그 자신이 앞장서서 프랑스 음악의 이상적인 전형을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이 컸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천재들은 역시 다른가 보다. 부담이 컸음에도 오히려 이 시기에 가장 특징적이고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작곡했으니까.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교향곡 3번 c단조’ 일명 “오르간”, 교향시 ‘죽음의 춤’, ‘첼로 협주곡 1번 a단조’, 관현악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가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그의 곡들은 독일 작품처럼 과장되게 심오하거나 무겁지 않으며, 클라이맥스의 힘에 기대지도, 신비스러움과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논리적이고 명확하며, 정직하다. 폭발적인 감동은 없지만, 기교적으로 완벽하며 장인의 기술이 돋보인다. 그리고 거칠지 않고 우아하다. 한마디로 프랑스 음악 하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런 음악이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게임 캐릭터가 루브르 박물관을 누빌 때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흘렀다. [중앙포토]
거창하고 복잡한 기법으로 음악가들이 경쟁하던 시절 이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음악으로 승부를 걸었다는 것이 놀랍다. 프랑스의 모차르트라고 불릴 정도로 놀라운 재능의 천재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용기다. 하지만 생상스가 택한 이 길이 다른 프랑스 작곡가들에게까지 통하지는 못했고, 지속 가능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게다가 프랑스의 유구한 전통을 부각하다 보니 생상스의 음악 언어는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이었고, 독일 작곡가들의 위업을 부정하려다 보니 새로운 경향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세대 작곡가들은 외국 작곡가의 작품을 백안시하는 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인상주의가 인기를 얻고 있는 미술계나 상징주의가 충격을 주던 문학계에 비해 19세기 말 프랑스의 음악계가 너무 보수적이라 여겼고, 화살은 생상스가 있는 국립음악협회를 향했다. 심지어 국립음악협회에 가입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드뷔시 같은 젊은 음악가들의 비난이 거세졌다. 게다가 새로 협회의 실무를 맡은 후배들이 그동안의 방침을 버리고 외국 작곡가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려고 하자, 그는 자신이 세우고 키워왔던 국립음악협회를 떠난다.

왜 인생에 불행은 한꺼번에 닥치는 걸까. 생상스가 음악계에서 공격을 받는 동안 그의 가정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인해 각별했던 어머니와의 사이가 크게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유복자로 태어난 생상스를 홀로 키워낸 어머니였다. 그는 세 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웠는데 한번 들은 선율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일곱 살에 벌써 작곡은 물론 악보를 분석해 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 살에 있었던 공식 무대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프랑스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생상스의 어머니는 이 천재 아들이 재능을 과시하지도 낭비하지도 않고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고,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를 한 번도 저버리지 않고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해주었다. 그래서일까. 결혼으로 인한 모자의 상처는 매우 깊고 컸다.

반대를 무릅쓴 결혼이었던 만큼 행복하기를 원했겠으나 삶은 그의 기대를 배신한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큰아들이 4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불과 6주 후에 작은아들마저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았다. 아내의 부주의 때문에 큰아들이 죽었다고 원망하던 생상스는 결국 아내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로 이별을 통고했다. 가족을 잃은 마음의 빈자리는 두 명의 아들을 가진 애제자 가브리엘 포레 부부와 가족처럼 지내면서 메꾸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1888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그는 다시 엄청난 슬픔에 빠진다. 상실감이 너무 커서 우울증과 불면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반대 무릅쓴 결혼 뒤 잇단 불운에 좌절
생상스 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중앙포토]
나이가 들수록 생상스는 외국 무대를 즐겼다. 그 시절 27개 나라를 179회나 가봤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날로 인기를 잃어가던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그를 여전히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음악계는 드뷔시의 인상주의나 스트라빈스키의 러시아 발레 같은 혁신적인 소리에 매혹된 상태였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춰진 생상스는 음악계 보수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그래서 진보적인 음악가들로부터 조롱과 질시를 받기 일쑤였다. 심지어 “레 식스”라는 급진적인 프랑스 모더니즘 6인조의 일원이었던 프랑시스 풀랑크는 선배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생상스를 천재라고 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라벨을 무시했을 정도였다. 그럴수록 생상스는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에 형식과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며 비판했고, 프랑스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86세 여름. 데뷔 75주년을 기념하는 독주회를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한 인간의 생애와 업적은 일정한 시간이 흘러야 제대로 평가받는 법. 20세기 전반 현대음악에 신고전주의가 도래했을 때야 비로소 생상스를 반동적인 보수주의자로 치부하던 진보적인 후배들조차 그가 절제와 논리와 명확함과 균형이라는 프랑스적 특성을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프랑스 음악의 유산을 계승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일까. 파리 올림픽 개막 공연에서 게임 캐릭터가 루브르 박물관으로 진입할 때 울려 퍼졌던 그의 ‘죽음의 무도’는 더없이 경쾌하고 선명했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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