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없는 이의 무덤 송령이골…“질책 같던 스님 말에 20년째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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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의 감귤원 사이 좁은 농로 한쪽에 소공원 같은 곳에서 제주의 민중 가수 최상돈이 동학농민혁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김 시인은 "그때는 이곳이 잡목과 가시덤불이 우거진 밀림이었다. 길가에만 조금 벌초를 하고 천도재를 끝냈는데 스님이 나지막이 '벌초라도 좀 하지 그러냐'고 했는데 그 말씀이 내게는 엄청난 질책으로 들렸다. 그 말씀에 용기를 내고 그해 8월15일부터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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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약속/ 산을 넘고 물을 건너던 우리 발걸음 다시 누군가 이어가리니/ 그러니 잊지 말아라/그날의 바람 우리를 길러냈으니/ 산줄기 되고 물줄기 되어 예 있으니/ 압록강 두만강 내어달리던 독립의 노래/ 백(두)산과 한라를 맺고 풀면서 들불이 되어 을미 갑오세 을미 갑오세…”
15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의 감귤원 사이 좁은 농로 한쪽에 소공원 같은 곳에서 제주의 민중 가수 최상돈이 동학농민혁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바람 들불 그리고 노래. 1894년에 드림’이라는 이 노래는 동학농민혁명 130돌을 맞아 그가 지은 노래다. 그가 부른 노래는 이곳과 어울렸다.
‘송령이골’(속냉이골)이라고 불리는 300여평 남짓한 이곳은 4·3 당시 희생된 무장대원들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보복과 보복은 숱한 제주도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949년 1월10일 당시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한 2연대가 주민 30여명을 학살하자 무장대가 이틀 뒤인 1월12일 새벽 이들을 기습했다. 이날 2∼3시간 남짓 전투로 2연대 병사 4명이 희생됐지만 무장대는 50여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2연대는 이들이 퇴각하자 곧바로 학교에 수용했던 주민 80여명을 끌어내 학살하는 보복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희생된 무장대원들은 흙만 대충 덮인 채로 방치됐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일부 주검은 희생자들의 가족이 수습했지만 대부분의 주검은 3개의 합동묘에 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령이골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이다. 그해 5월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이 주도한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의귀리에서 희생된 이들을 모신 ‘현의합장묘’에서 천도재를 지낸 뒤 송령이골에서도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재를 지냈다. 김경훈(63)시인은 “도법 스님 일행이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할 때 이곳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곳에서도 천도재를 지내주시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는데 흔쾌히 승낙을 해줘서 그해 5월13일 천도재를 지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그때는 이곳이 잡목과 가시덤불이 우거진 밀림이었다. 길가에만 조금 벌초를 하고 천도재를 끝냈는데 스님이 나지막이 ‘벌초라도 좀 하지 그러냐’고 했는데 그 말씀이 내게는 엄청난 질책으로 들렸다. 그 말씀에 용기를 내고 그해 8월15일부터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올해로 벌초 행사를 가진지 만 20년이 됐다. 최상돈 가수와 김 시인은 20년째 빠지지 않고 해마다 8월15일이면 이곳을 찾는다.
벌초하면서 주변이 정비돼 소공원 같은 느낌이다. 재작년에는 소유주가 있어 이묘해 간 산소의 주변을 둘러싼 돌담을 이용해 방사탑을 쌓고 돌로 조형물을 만들었다. 김 시인은 해마다 15일을 앞두고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내면 알아서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예초기를 갖고 오거나 낫을 갖고 와 벌초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도 자발적이다. 이날도 오전 10시부터 벌초를 하기로 했지만 8시30분에 도착해 벌초하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5∼7명이 시작한 ‘벌초 행사’는 차츰 알려지면서 올해의 경우 개인과 단체 등에서 60여명이 찾았다. 올해 처음으로 제주4·3유족회 남원읍 지회에서도 찾아 함께 했다. 각자가 생선이나 빵 등 제물을 준비해와 벌초가 끝나면 제례를 하고, 나눔 한다. 이날도 여러 단체와 개인이 치킨을 갖고 오거나 떡, 김밥, 고기적, 생선적들을 갖고 와 이야기를 나누며 8·15에 4·3의 의미를 되새긴다.
2004년 5월13일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이곳에 세운 푯말은 이렇게 돼 있다.
“우리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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