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광복회가 이종찬 기념사 읽자... 총영사 “말 같지도 않은 얘기”
“저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여기 계속 앉아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5일 오전 11시 미국 뉴욕 맨해튼 뉴욕한인회에서 김의환 뉴욕총영사가 경축사를 하기 위해 굳은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장내는 순간 싸늘해졌다. 김 총영사가 지목한 ‘이야기’는 유진희 대한민국 광복회 뉴욕지회장의 기념사였다. 김 총영사 직전에 발언한 유 회장은 이종찬 광복회장의 광복절 기념사를 대독했는데, 김 총영사는 이 회장의 기념사 내용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김 총영사가 이렇게 말하자 뒤편에서는 한 참석자가 “옳소!”라고 외쳤고, 이후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 참석자가 “저렇게까지 말해도 되나”라고 혼잣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날 뉴욕한인회는 79주년 광복절 경축식을 진행했다. 경축식엔 약 150명이 모였다. 모인 사람 중 상당수는 가슴에 훈장을 단 참전 용사들이었고, 뉴욕주 상원 의원 등 미국 정치인도 여러 명 자리했다. 또 한국계 중·고등학생 20여 명이 광복절을 축하하기 위해 일찌감치 착석해 있었다.
뉴욕한인회에 따르면 매년 광복절 경축식은 축제 분위기로 진행됐다고 한다. 이날도 행사 초반 ‘정혜선 한국전통예술원’ 공연자들이 ‘난타’ 공연으로 흥을 돋웠다. 그런데 국민의례 및 종교인 대표 기도가 끝나고 유 회장이 이종찬 회장의 기념사를 대독하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유 회장이 대독(代讀)한 기념사는 이 회장이 한국에서 정부 공식 행사와 별도 기념식을 열어 읽은 것과 같은 내용이다. “지난 시절 여러 차례 시도했던 ‘건국절’ 제정 음모는 독립운동 세력을 약화, 분열시키고 민족혼을 빼는 이적 행위나 다름없다” “이런 악행을 저지른 자는 일제 시기 밀정(密偵) 같은 존재여서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도 있었다.
건국절 논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로 기념하자는 주장에 대한 오랜 찬반 공방이다. 이종찬 광복회장이 최근 임명된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을 (건국절을 옹호하는) ‘뉴라이트’라고 비난하면서 갈등이 재점화됐다. 윤석열 정부가 이미 건국절을 추진하거나 계획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음에도 논란이 이어져 15일 광복절 행사가 분리돼 열렸다. 한국에서 벌어진 이 같은 ‘건국절 추진’ 논란은 이날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뉴욕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유 회장은 이종찬 회장의 기념사를 그대로 읽긴 했지만 이는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대독하는 ‘관례’에 따른 것일 뿐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그는 대독 전 사견(私見)임을 전제로 “광복절은 과거에 머문 게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토대를 설계하는 날이다. 광복 이후 남북으로 갈라지고, 다시 남남으로 갈라져 광복절을 기념하게 되어 무척 아쉽다”고 말했다. 한 참석자는 “유 회장은 원래 과묵해 정치적인 발언을 안 하는 분인데 오늘은 이례적으로 소신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
김 총영사의 발언은 그 직후 나왔다. 그는 작정한 듯 “정부를 대표해 준비한 발언을 하겠다”며 자신이 작성해 온 글을 읽었다. 김 총영사는 “지금 한국은 일부 세력의 무분별한 반일 주장으로 인해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리고 그분들의 고귀한 뜻을 이어 대한민국 번영과 통합 의지를 더욱 다지게 하는 뜻깊은 광복절마저도 혼탁한 정치 논리로 오염시켰다”면서 “반일로 먹고사는 정치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키울지 몰라도 절대로 그런 것으로 일본을 이길 수는 없다”고 했다. 또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과거와 싸우기만 한다면 미래를 잃어버리게 된다. 광복절을 통해 선동적이고 무조건적인 반일 주장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세계의 기적으로 인정받는 대한민국의 번영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참석자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고 했다. 김광석 뉴욕한인회장은 김 총영사에게 “광복회에서 이종찬씨 말을 대독하는 줄 알았으면 말릴걸 그랬다”고 했다고 전해졌다. 한 참석자는 “일본에서 벗어난 지 79년이 됐는데 우리는 아직도 과거에 붙잡혀 사는 것 같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참 면목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현지 정치인들도 참석한 가운데 국가적으로 부끄러운 상황이 펼쳐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축식은 한국어로만 진행됐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이런 논란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광복절이란 국가 기념일을 두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분열이 여러 경로로 전해질 가능성이 크다.
유 회장은 본지 통화에서 “광복절에 단합되지 못하고 분열한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사견을 밝혔다”고 했다. 김 총영사는 “처음에 준비한 원고에는 더 강한 표현도 있었지만 순화했다. 이종찬 회장의 기념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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