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은 기초과학인 동시에 첨단과학"…72년만 첫 여성 물리학회장 윤진희 교수

문세영 기자 2024. 8. 1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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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물리학회로 만들 것…과학자 처우 개선돼야"
7일 인하대 용현캠퍼스에서 윤진희 교수가 동아사이언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세영 기자.

"연구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어요. 복원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기 전 R&D(연구개발) 예산 삭감 같은 상황이 반복돼선 안 되고 기초과학을 등한시하는 풍조는 바뀌어야 해요. 과학기술인의 암담한 처우 수준은 개선해야 하고 소외된 연구와 연구자를 보듬을 수 있는 환경도 마련해야 해요. 다음 세대는 물리학 분야에서 꿈을 키울 수 있게 해야죠.“

지난달 30일 차기 한국물리학회 회장으로 선출된 윤진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는 미래 먹거리의 기반이 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학문 자체에 대한 선입견, 적정 지원 및 처우 부족 등으로 물리학이 외면되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지역대학들은 물리학과를 폐지하고 새로운 세대들은 실용성·안정성 기준으로 입시를 준비하거나 취업을 하고 있다. 

윤 교수가 물리학을 택할 땐 지적 호기심이 지원 동기가 됐다. 윤 교수는 “어렸을 때 천체에 관심이 있었는데 천체는 입자로 이뤄진 세계라는 점에서 입자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며 “입자들이 모여 덩어리가 되는 핵이 입자 간 상호작용으로 다양한 형태를 갖는다는 점에 끌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뭉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은 인간 사회의 다양성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윤 교수처럼 지적 호기심이 학과 및 직업 선택의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고 있다. 

윤 교수는 2025년 1월부터 2년간 차기 물리학회장으로 지내는 동안 아이들이 다시 물리학을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고무적인 것은 물리학계가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윤 교수가 물리학회 72년 역사상 첫 여성 학회장이 된 사실이 하나의 방증이다. 

1986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미국 퍼듀대에서 핵물리학이론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5년 윤 교수가 인하대에 부임할 당시만 해도 물리학계에 여성이 거의 없었다. 인하대 물리학과에서 여성 교수는 윤 교수가 유일했고 18년이 흐른 2013년이 돼서야 두 번째 여성 교수인 권민정 교수가 부임했다. 현재는 박혜진 교수까지 3명의 여성 교수가 있다. 

물리학계 여성 비율은 아직 20%가 안 되지만 지난 20여년간 크게 증가했다. 올해는 최초의 여성 물리학회장이 선출됐고 이런 시류를 타고 윤 교수는 내년부터 시작하는 물리학회장 임기 동안 더 큰 변화를 이끌겠다는 목표다. 

Q. 첫 여성 한국물리학회장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됐다. 성별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남초 사회에서 학회장이 된 건 고무적인 측면이 있다. 물리학계가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가. 

"학회 일을 2002년부터 시작했다. 당시엔 여교수가 있는 학교가 손에 꼽혔는데 그 이후 여성 물리학자들이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합리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논리적인 이유와 설명이 있으면 납득하고 수긍한다. 이런 분위기가 여성의 지위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 리더십 위치에 이르는 덴 좀 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회장으로 선출되기까지 7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앞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겠다."

Q. 미국물리학회도 한국계 여성인 김영기 시카고대 교수가 학회장을 맡고 있다. 물리학계에서 여성과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으로 해석하면 될까.

"한국이 경제적인 성장을 크게 이루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또 물리학 쪽에서는 대형가속기가 건설되고 자체적인 인력 양성도 가능해졌다. 역량이 상당히 높아진 것이다. 세계적인 흐름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번 미국 대선에 여성 후보가 있다. 김영기 교수가 학회장이 된 것도 그런 흐름 중 하나겠지만 더불어 본인의 노력도 상당히 중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Q. 학회장 선거 당시 슬로건이 ‘바꿉시다. 우리 모두의 물리학회로’였다. 모두의 물리학회란 어떤 의미인가.

"회원 수가 크게 늘면서 물리학회가 단일학회로는 꽤 큰 규모가 됐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변화를 끌어내기 어려운 요인들이 생겨 정체된 분위기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회원들이 있다. 학회는 몇 사람이 이끄는 게 아니라 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모두 함께 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동안 수도권과 대학 소속 회원 위주로 학회가 운영돼왔고 지역 회원들이나 연구소 또는 회사 소속 회원들은 소외감이 컸다.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로 학회를 구성하면 의견 불일치나 불협화음이 일어날 수 있지만 이를 방지할 수 있는 투명성, 공정성을 기반으로 학회를 이끌어가고자 한다."

윤진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가 동아사이언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세영 기자.

Q. 지난해와 올해를 관통하는 과학계 이슈는 R&D 예산 삭감이다. 물리학계 현재 상황은 어떤가. 또 차기 학회장으로서 이와 관련해 어떤 활동 계획을 갖고 있나.

"학회장 선거 기간 전국 대학 및 연구소를 돌며 많은 물리학자들로부터 연구 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예산 삭감으로 연구 생태계가 크게 무너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구는 특정한 목적성을 가지고 진행하기도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다양성이 앞으로 없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연구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연구비’와 소외된 연구 분야까지 지원할 수 있는 ‘블록펀딩’이 가장 크게 삭감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 그동안 연구해놓은 백신 연구가 빛을 본 것처럼 기초과학은 언제 필요할지 알 수 없는 분야까지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리학은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학문이다. 

기초과학학회협의체, 기초연구연합회,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등과 협업해 방안을 마련해볼 계획이다. 특히 한림원 원로 과학자들이 정부 상대로 목소리를 내면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Q. 물리학은 양자 컴퓨팅, 반도체 등 첨단테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물리학과 첨단테크를 별개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중 인식을 바꾸기 위한 계획도 있나.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개발한 월드와이드웹이 오늘날 인터넷 세상을 만들었다. 양자 컴퓨팅의 양자도 대표적인 물리 과목이다. 반도체, 양자 컴퓨팅 등 첨단테크가 물리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아닌 기술로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대중강연에서 첨단과학을 다뤄볼 생각이 있다. 그동안 학회가 대중강연을 많이 해왔지만 주로 아이들의 호기심에 맞춰 천체나 핵입자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이제 그 범주를 반도체나 양자 컴퓨팅뿐 아니라 양자 센서, 신재생에너지 등의 첨단과학으로 넓히고자 한다."

Q. 의학이나 응용과학 대비 기초과학은 등한시되는 풍조가 있다. 왜 그런가.

"학생들이 의대에 가려는 이유는 안정된 직업과 그에 따른 보상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자부심, 명예를 기준으로 학문을 선택했지만 그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과학기술인 처우가 좋지 않았던 게 기초과학을 외면하는 사회 풍조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 부분이 개선되지 않으면 풍조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현재 과학기술인에 대한 처우는 암담한 수준이다. 연구직이 행정직보다 급여가 낮은 상황도 있고 반값등록금 등으로 교수 급여는 거의 정체된 상태다. 연구실에 있던 학생들이 박사가 된 뒤 기업에 취업해 4~5년이 지나면 교수보다 연봉이 훨씬 높아진다. 급여가 전부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생활, 자부심과 연관된 부분이니 개선이 필요하다."

Q. 연구 규모가 커지는 만큼 국제협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앞으로 어떤 협력 체계를 구축해 나가야 할까.

"국제협력은 연구자 간 1대1 교류가 아니다. 팀 단위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단기간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마찰 없이 원팀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동일한 목표를 갖고 움직이는 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민주적 운영이다. 각기 다른 연구자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려면 이해를 기반으로 양보하는 마음이 필요하며 이를 기반으로 성과를 얻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기적인 성과에 치우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진행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Q. 과학계에서 들려오는 잡음에 대해서도 차기 학회장으로서의 의견을 듣고 싶다. 우선 파벌싸움 문제다. 가령 핵물리학자와 입자물리학자 간 미묘한 신경전은 ‘건강한 신경전’ 또는 ‘선의의 경쟁’으로 보인다. 그런데 건강하지 않은 신경전이나 파벌싸움이 있다. 물리학계는 어떤가.

"건전한 경쟁은 사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 파벌은 집단이 공정하지 못한 방법을 동원할 때 생긴다. 공정성을 잃은 상황에서 이를 개선하려면 학계의 자정 능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번 학회장 당선은 자정 작용에 대한 회원들의 기대감이 모인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상황이 개선될 것이란 희망을 갖고 있다."

Q.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처럼 과학기술인과 과학기술단체를 육성·지원하는 단체가 본질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건지 의구심을 제기하는 과학계 목소리도 들려온다. 과학기술 지원 단체는 어떤 기능을 해야 할까.

"과학기술인과 단체들을 부흥시키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될 것 같다. R&D 예산 삭감 사태 때 과학기술인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부분에서 불만스러운 시각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물리학회도 과총 회원으로서 격려·지원하면서 동시에 감시하는 역할을 하며 함께 돕고 조정해 나가는 역할을 할 것이다. 

또 중요한 건 과학에 정치가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연구비 삭감 사태처럼 정치가 개입하거나 결탁하면 여러 잡음이 생긴다. 정치인들은 과학 분야에서 한 발짝 물러서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고 과학계 지도자들은 정치와 거리를 두고 과학을 위해 힘써주길 바란다."

[문세영 기자 moon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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