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장제스 만남 ‘1933년 5월說’ 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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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는 중국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처음 만났다.
따라서 장제스·김구 회담을 이보다 늦은 시점으로 추정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구가 장제스를 처음 만난 그달부터 임시정부 본부를 난징으로 옮긴 1935년 11월까지가 1기.
특유의 지적 성실로 김구가 난징을 떠난 시점의 특정은 미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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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안칭 지음│박지민 옮김│공명
백범 김구는 중국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처음 만났다. 그런데 언제?
두 사람의 만남은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의 일대 전환점이 됐다.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에 대한 안전 보장·보조금 지원 등의 파격적 조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 의미가 매우 큰데, 그 시점은 지금까지 추측만 무성했다. 온라인에서는 추정을 전제로 한 ‘1933년 5월설’의 검색량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은 해당 설이 오류라고 못을 박고 ‘1932년 12월 10일’로 특정했다. 저자가 난징대 박사 학위를 받고 도시연구자로서 이 지역에 머물며 김구를 연구한 결과다. 우선 장제스가 김구와의 만남을 주선한 천궈푸(陳果夫)를 통해 임시정부에 무관 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한 것이 1933년 2월. 뤄양(洛陽) 군사학교에서 한국인 훈련을 허용했던 지시가 이때 나왔다. 따라서 장제스·김구 회담을 이보다 늦은 시점으로 추정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저자는 장제스의 접견실에서 근무했던 인물의 기록을 제시했다. 그 직원은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기 전인 1932년 겨울, 장제스가 김구를 비밀리에 만났다”고 썼다.
이 외에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구의 난징 생활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김구가 장제스를 처음 만난 그달부터 임시정부 본부를 난징으로 옮긴 1935년 11월까지가 1기. 김구는 난징을 비롯해 전장(鎭江),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등을 떠돌며 일본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해 다녔다. 자싱에서 지냈던 시절 김구는 ‘장천지우’(張震球) 또는 ‘장천’(張震) 등으로 이름을 바꿔 광둥(廣東) 출신의 상인으로 행세했다. 김구는 당시 자신을 만났던 중국인들에게 ‘장 씨 아저씨’ ‘장 선생’으로 기억됐다. 그리고 1937년 11월까지 2년간은 난징에 정착했던 2기다. 김구의 아들 김신, 어머니 곽낙원 여사 등도 이곳에서 지냈다. 다만 난징이라는 경계선 안에 있었을 뿐, 김구는 난징 곳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이 책이 수록한 당시 김구 가족의 사진, 거주지 등 사진 자료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특유의 지적 성실로 김구가 난징을 떠난 시점의 특정은 미뤘다. 중일전쟁을 피해 김구가 탑승할 수 있었던 선박 입·출항 등을 활용해 범위를 좁힌 결과, 1937년 11월 21일에서 12월 2일 사이였다. 더 좁힐 수 있는 추가 자료는 찾지 못했기에 여기서 유보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284쪽, 2만 원.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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