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 피해 없었다'…뻔한 거짓말에 사활 거는 북한 [스프]

안정식 북한전문기자 2024. 8. 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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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식의 N코리아 정식] '인명 피해 없었다'…뻔한 거짓말에 사활 거는 북한

지난달 말 압록강 지역에 많은 비가 내려 강이 범람하면서 신의주 일대의 마을과 농경지들이 대거 물에 잠겼습니다. 비 피해는 평안북도 신의주 일대뿐 아니라 자강도, 양강도 지역까지 광범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정은 총비서는 수해 지역을 방문해 고립된 주민들의 구조를 지휘하는가 하면, 고무보트를 타고 물에 잠긴 현장을 둘러보고, 현지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기도 했습니다. 또, 구호품을 가지고 현장을 방문하는가 하면, 이재민들의 임시 피난처를 찾아 이재민들과 만나는 등 재난 현장을 직접 살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무보트를 타고 수해현장을 살펴보는 김정은
북한 전역에서는 신의주 물난리를 복구하기 위한 전국적인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평양과 각 지역 당원들이 재해지역 복구에 동원되었고, 젊은이들로 구성된 이른바 ‘백두산영웅청년돌격대’가 평양에서 김정은 참석 하에 진출식을 가진 뒤 곧바로 재난현장으로 투입됐습니다. 21세기에도 전형적인 노력동원 방식으로 재난을 극복하겠다는 과거형의 접근방식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쨌든 북한식의 방법으로 국가적 재난사태에 총력 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해 현장을 몇 차례나 찾은 김정은은 복구사업을 독려하는 와중에 남한에 대한 비난을 쏟아 냈습니다. 남한 언론이 북한의 수해 피해를 과장해 북한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김정은 동지께서는 지금 적들의 쓰레기언론들은 우리 피해지역의 인명피해가 1,000명 또는 1,5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구조임무 수행 중 여러 대의 직승기(헬기)들이 추락된 것으로 보인다는 날조된 여론을 전파시키고 있다고 하시면서 이러한 모략선전에 집착하는 서울 것들의 음흉한 목적은 뻔하다고 까밝히시였다.
김정은 동지께서는 적은 변할 수 없는 적이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하나 우리를 깎아내리고 우리 공화국의 영상에 먹칠을 하자고 악랄한 모략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한국 쓰레기들의 상습적인 버릇과 추악한 본색을 신랄히 지탄하시였다.”

<조선중앙통신, 8월 3일>
“우리가 이번 재해복구가 단순히 우리들 자신만의 사업이 아닌 심각한 대적투쟁임을 다시 한번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적들은 우리가 피해를 입은 기회를 악용하여 우리 국가의 영상에 흙탕물을 칠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은 적은 바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사실자료를 놓고 전국가적으로 대적인식을 바로하고 대적감정을 바로 키워야 합니다. 적은 변할 수 없는 적입니다. 적이 어떤 적인가를 직접 알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대적관을 바로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조선중앙통신, 김정은 연설, 8월 10일>

인명 피해 없었다는 북한

북한은 신의주 일대에 물난리가 났지만 김정은의 지휘 아래 모든 주민들을 구조했고 인명 피해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민 구조과정에서 헬기 1대가 불시착한 사례가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인명피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북한 주장입니다.
“김정은 동지께서는 압록강 류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고 물류입량이 급격히 늘어나 침수로 인한 피해가 제일 컸던 신의주지구에서 인명피해가 한 건도 나지 않은 이 사실이야말로 기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임무수행 중 1대의 직승기(헬기)가 구조지역에서 불시착륙한 사실이 있으나 비행사들이 모두 무사한 것 역시 고맙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조선중앙통신, 8월 3일>
하지만, 북한의 이런 주장은 지난달 29일과 30일 신의주 현지에서 ‘정치국 비상확대회의’가 소집됐을 때의 보도와 달라진 것입니다. 북한은 당시에는 인명피해를 인정했습니다.
 
“김정은 동지께서는 … 당과 국가가 부여한 책임적인 직무수행을 심히 태공함으로써 용납할수 없는 인명피해까지 발생시킨 대상들에 대하여서는 엄격히 처벌할 것을 제기하시였다.”

<조선중앙통신, 7월 31일>
김정은이 지난달 29일과 30일 신의주에서 개최한 ‘정치국 비상확대회의’
북한 현지 주민들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북한 소식을 전하는 대북매체들의 보도를 보더라도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북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대북매체들의 북한 내 소식통들은 공통적으로 이번 수해로 압록강 유역에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대북매체들의 북한 발 보도에 절대적인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개의 매체에서 비슷한 소식들이 연이어 전해진다면 현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이번 수해의 인명피해와 관련해 대북매체들이 전하고 있는 보도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평안북도 소식통, “홍수로 침수된 위화도 섬에서만 수백 명이 행방불명 … 행방불명은 대부분 사망 의미”
■ 수재민들, 노부모나 어린 자녀가 홍수에 떠내려간 것 통곡하다가 감시요원에게 저지당해
■ 감시요원들, 수재민들에게 ‘최고존엄이 위험 무릅쓰고 침수지역 인민들 구출했다’는 영상 보게 해
■ 당국 감시로 수재민들이 울지도 못하고 가슴에 한이 쌓여 고열과 두통 호소하기도

<자유아시아방송, 8월 2일>
■ 자강도 수해 복구 작업에 투입된 북한 군인 인터뷰
“현장에 가면 매일 시체를 본다. 물에 불은 시체를 보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어떤 군인들은 시체를 치우면서 토하기도 했다. 구조 나온 군인들은 매일 시체를 수습하는 일을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다.”

<데일리NK, 8월 5일>
 
■ 신의주 홍수 당시 북한 당국이 사전 대피 조치 내리지 않아 주민 피해 커
■ 신의주 소식통, “북한 당국, 단둥 인근의 위화도 침수될 무렵에야 헬기 등 동원해 구조작업 시작”
■ 구조작업 진행되기 전 미처 피하지 못해 사망하거나 실종된 수가 수백 명은 될 것

<SPN 서울평양뉴스, 8월 6일>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마을이 통째로 잠겨 지붕만 남은 집들이 많은데 인명피해가 없었을 리 없습니다. 대피가 적절히 이뤄졌다 해도 인명피해가 없기 힘든 상황인데, 대북매체들의 보도를 보면 당국의 대피 지시도 제때 내려진 것 같지 않습니다.
북한이 공개한 수해지역 사진, 지붕만 남긴 채 마을이 통째로 물에 잠기었다.

북한은 왜 “인명 피해 없다” 거짓말을?

그렇다면, 북한 당국은 왜 “인명피해가 없다”며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부분은 집중적으로 수해가 발생했던 지난달 27일의 상황을 되짚어봐야 합니다.
 
지난달 27일 압록강 유역에는 많은 비가 쏟아지면서 제방이 무너지고 마을들이 침수되는 물난리를 겪었지만, 평양에서는 이른바 ‘전승절’ 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됐습니다.
 
‘전승절’이란 6.25 전쟁의 정전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을 이르는 것으로, 북한은 이날을 미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의미로 ‘전승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6.25 전쟁을 북한의 승리로 둔갑시키면서 노병들을 불러 체제결속의 장으로 삼고 있는 것인데, 올해 전승절인 지난달 27일에도 북한은 평양에서 ‘6.25 당시 부대들의 기념행진’이나 ‘야외 경축공연’ 같은 대규모 기념행사를 가졌고 김정은도 참석했습니다. 신의주와 압록강 일대에는 폭우가 쏟아져 주민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평양에서는 떠들썩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지난달 27일 평양에서 열린 ‘전승절’ 경축공연
북한이 비 피해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전승절’ 하루 전인 지난달 26일 조선중앙TV의 저녁 8시 보도(뉴스) 날씨 예보를 보면, (7월) 26일 밤과 27일 평안북도와 자강도 지역에서 “폭우를 동반한 비교적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며 주의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폭우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면,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비 피해 예방과 주민들의 안전을 챙기는 것이 국가의 할 일이었지만,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평양에서의 전승절 행사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피해가 커질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북한 당국의 무능과 무대책이 그대로 드러난 참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아마 정권이 흔들리고도 남았을 일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안정식 북한전문기자 cs7922@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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