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암태도 소작쟁의를 기억하라 [박찬승 칼럼]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올해는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소작쟁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쟁의이다. 암태도는 전남 신안군(과거 무안군)에 속해 있는 중급 규모의 섬이다. 현재는 신안군청이 있는 압해도에서 천사대교로 이어져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12월 암태도민들이 소작인회를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소작인회의 결성을 주도한 이는 서태석이다. 암태면 기동리에 살던 서태석은 같은 마을의 서창석과 협의하여 소작인회를 만들었다. 그는 1922년 이후 경남 진주와 전남 순천에서 진행되고 있던 ‘논의 소작료를 4할로 하자’는 농민들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었다. 당시 순천에서는 면별로 소작인회를 조직해 이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고, 순천지주회는 결국 소작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암태소작인회도 창립 즉시 소작료 4할을 내걸고 지주들과 면담하여 이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193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출간한 ‘조선의 소작관행’을 보면, 19세기엔 집조소작(추수 전에 지주 쪽 마름과 소작인이 논에 나가 그해 소출을 계산하여 소작료를 결정하는 방법)의 경우 소작료는 수확의 3분의 1 수준이었고, 대신 세금을 소작인이 내고 있었다. 그런데 1905년 이후 일본인 지주들이 들어오면서 지주가 세금을 내는 대신, 소작료를 2분의 1 이상으로 올리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에 소작인들은 1920년대 들어 소작료를 이전과 비슷하게 40% 수준으로 내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암태소작인회의 요구에 암태도의 다른 지주들은 이를 수용했으나, 최대 지주인 문재철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암태소작인회는 문재철에 대한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불납동맹을 시작했다. 소작인회 쪽은 1924년 3월27일 면민대회를 열어 지주 쪽을 압박했다. 이날 문재철가의 문씨들도 모여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양쪽은 결국 크게 충돌하였다. 지주 쪽은 자신들이 맞아서 부상을 당했다고 경찰에 고소했고, 경찰은 서태석 등 소작인회 간부 13인을 검속했다.
6월4일 암태도 소작인 400여명은 검속된 13인을 석방시키기 위해 목포로 배를 타고 가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몰려가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법원 쪽은 예심의 결과를 기다려보라고만 말했다. 소작인들은 일단 암태도로 돌아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7월3일 13인이 예심에서 석방되지 않고 모두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에 7월8일 암태도민 500여명이 10척의 배를 타고 다시 목포로 나왔다. 이들은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가서 13인을 석방하지 않으면 모두 그곳에서 죽겠다면서 ‘아사동맹’, 즉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의 단식투쟁은 6박7일간 진행되었다. 이 일은 당시 여러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고, 전국에서 이들을 응원하는 전보와 동정금이 쇄도했다. 소작인들은 목포에 있던 문재철의 집에도 몰려가 협상을 요구했으나, 문재철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소작인들은 암태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목포경찰서장은 암태도 문제가 치안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문재철을 만나 양보를 종용하였다. 군청도 압력을 넣었다. 결국 문재철이 양보하여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소작료를 4할로 하고, 농업장려금으로 1할을 더 거두어 소작인회가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소작료 4할제를 얻어낸 것이다.
암태소작인회 쪽의 소작료 4할 투쟁은 이웃 섬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도에서도 1924년 1월 김상수·나만성이 중심이 되어 소작인회를 조직하여, 그해 10월에 논의 소작료 4할, 밭의 소작료 연 1회 납부 등의 요구를 내걸고 지주 쪽과 협상에 들어갔다. 소작인회 쪽은 각 마을에 ‘을축동맹’이라는 것을 만들어 소작인들의 결속을 도모했다. 지도의 지주들은 결국 소작인들의 강력한 단결 앞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지도의 소작인들도 승리를 거두었다.
자은도와 도초도 소작인들도 움직였다. 자은도에서는 1924년 1월, 도초도에서는 1924년 10월 소작인회가 각각 조직되었다. 이들 소작인회는 1925년 여름에 논의 소작료 4할, 밭의 소작료 3할을 내걸고 지주 쪽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지주 문재철 쪽은 ‘다도농담회’라는 지주회를 만들어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법원에 소작료 가차압을 신청했다. 그해 가을과 겨울, 가차압을 위해 집달리와 경찰이 도초도와 자은도에 왔다. 소작인들은 이를 가로막았고 결국 충돌이 빚어졌다. 목포경찰서는 100명이 넘는 경찰을 다시 도초도와 자은도에 파견하여 소작인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이들의 연행 과정에서 군중과 충돌이 빚어졌고, 소작인들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공무집행방해죄, 소요죄, 상해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자은도에서는 지주 쪽과 소작인 쪽이 협상을 통해 논의 소작료를 5할로 하되, 그 가운데 10분의 1을 장학금으로 소작인들에게 교부한다는 합의를 이루었다.
이처럼 소작인들은 암태도와 지도에서는 명백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자은도에서는 절반의 승리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작은 승리가 아니었다. 당시 육지에서 이들처럼 소작료 4할을 내걸고 이를 관철한 곳은 순천·광양 외에는 없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첫째, 이들에게는 굳건한 단결력이 있었다. 소작인회는 각 마을에 노농단, 을축동맹 등 하부 조직을 두어 회원들의 이탈을 철저히 막았다. 둘째, 4할의 소작료가 시대적 요구라는 것을 인식한 서태석·나만성과 같은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었다. 셋째, 무안농민연합회와 같은 조직을 결성하여 각 면 소작인회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넷째, 사립학교나 서당, 여자강습원 등을 통해 청소년과 여성 교육을 활발히 하여 소작인조합을 이끌어갈 인재들을 키워놓았다. 다섯째, 전국적으로 언론과 사회단체가 이들의 소작쟁의를 지원하는 여론을 형성해주었다.
1920년대 중반 암태도 등의 소작쟁의 승리는 이 지역 민중의 역량이 그만큼 성장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역량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이들 섬에 들어가 오랜 세월 농지를 개간·간척하고, 삶의 터전인 마을을 만들고, 서당을 만들어 교육에 힘쓰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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