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eople] '미술올림픽' 출전 오지윤 작가 "환갑 넘어 빛을 보네요"
부조에 가까운 단색화로 차별화…"구도(求道)의 붓질 속 장인정신 인정한 듯"
'그림으로 무심(無心) 경지 도달'이 최종 목표…"모작·표절 사라져야" 쓴소리도
(서울=연합뉴스) 김지선 기자 = "처음에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스타가 된 배우처럼 얼떨떨하기도 하고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그래도 작가의 숙명으로 여기고 우직하게 그려온 그간의 노력을 알아봐 주신 것 같아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본사에서 만난 서양화가 오지윤(62)씨는 올해 베네치아비엔날레 해외 파빌리온 방글라데시 국가관 공식 작가로 5개월여를 보낸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세계 최대 현대미술 축제이자 '미술올림픽'이라고도 불리는 베네치아비엔날레의 국가관은 각국 예술감독이 엄선한 작가들의 대표작이 선보이는 자리. 오씨는 지난 4월 '접촉'(The Contact)을 주제로 한 방글라데시 국가관의 초대장을 받고 자신의 작품 '해가 지지 않는 바다'와 '존엄'을 내놨다.
이후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스위스 제노바에 이어 오는 10월 로마에서 초대전이 열리고, 현지 미술 전문매체에 대대적으로 소개되는 등 유럽 전역에서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다.
무명에 가까웠던 그가 환갑을 넘긴 나이에 비엔날레 무대에 데뷔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베네치아비엔날레 방글라데시관 큐레이터인 비비아나 바누치가 지난해 10월 로마아트엑스포에 전시된 '해가 지지 않는 바다' 시리즈를 보고 한눈에 반한 것.
"시각적인 시처럼 은유와 성찰이 풍부한" 오씨 작품은 "'장인정신' 측면에서 차별화되는 특색을 갖췄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베네치아비엔날레 본부 큐레이터인 나탈리아 그리니우크 역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조형적 실험"이자 "끊임없는 노동으로 인간사 부조리에 대한 번민과 고뇌, 약자를 향한 연민과 동정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현지 관람객들 또한 '갑자기 눈물이 난다', '마음이 경건해진다' 등 호평을 쏟아냈다고 한다.
오씨는 "유럽 단색화는 우리나라처럼 재료가 다양하거나 입체감이 살아있는 경우가 드물다"며 "서양화 같기도 하고 동양화 같기도 한 느낌이 사람들의 눈에 확 띈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내면의 사유를 화폭에 담아내는 모습은 수도승의 수행을 연상케 한다.
삼베로 짠 마대를 캔버스에 붙이고 모델링 페이스트와 자작나무 가루 또는 차콜을 섞어 발라 거친 면을 메운 다음 내구성을 높이고 물감의 번짐을 돕기 위해 얇은 한지를 여러 차례 덧바르면 밑그림은 일단 완성.
건조기로 말리는 데만 길게는 일주일 이상 걸리는 이 단계가 마무리되고서야 본격적으로 채색이 시작된다.
수백번, 수천번 반복된 붓질로 결을 만들고 그 위에 화려한 진주·다이아몬드 가루, 순금박지 등을 입혀 금욕적인 단색조와 대비를 이뤄내는 것.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단색화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치 '부조'와 같은 입체감을 갖게 된다.
100호 크기 대작은 그 무게만 40㎏에 달해 전시장 가벽에 걸지 못하는 일도 가끔 생긴다며 오씨는 수줍게 웃었다.
이 같은 방식은 지난 2018년 11월 초대전 참가 차 잠시 머물렀던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한 동자승의 싸리 빗자루 자국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오씨는 "또래들은 다 자고 있을 찬 새벽녘 홀로 마당을 쓰는 나이 어린 승려의 뒷모습에 가슴이 시렸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층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는 그는 "늘 기도하고 명상하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그에게도 베네치아비엔날레 출품을 앞두고 하루 최대 18시간씩 계속된 여정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주변에서 좀 더 손쉬운 기법으로 갈아타라고 조언하는 와중에 "엄마의 화두 자체가 쉽지 않은데, 예술로 승화하는 게 어디 쉽겠느냐"는 아들(32)의 한마디가 그에게 '죽비소리'처럼 따끔하게 내리쳤다.
정작 자신은 개신교 신자지만 해인사 등이 주요 소장처일 만큼 불교와 유난히 인연이 깊다는 그는 최종 목표 또한 "석가모니처럼 그림을 통해 무심(無心)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오씨 이외에도 한국 작가 4명이 한꺼번에 본전시에 초청되는 등 이번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K-미술'은 존재감이 단연 돋보였다.
그는 행사장을 둘러보며 특히 '설치' 부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중국 작가 쩡판즈(曾梵志)를 위해 베네치아의 오래된 수녀원을 거대한 전시장으로 탈바꿈시킨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기획력에 큰 감명을 받았다.
또 언젠가는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고성(古城)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를 해보고 싶다는 소망도 품게 됐다.
이번 비엔날레를 계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 동료 작가들에게 못내 미안해 처신이 조심스럽다고 고백한 오 씨는 "그림이 잘 팔리는 것도 좋지만,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림을 한꺼번에 '입도선매' 하겠다고 나선 한 콜렉터의 제안을 고사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중견 작가로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후배들 사이에 만연한 모작, 표절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 미술계 자체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것.
내년 4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둔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작업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sunny1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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