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설] 두 아들 홀로 키운 엄마, 15번 수술 이겨내고 파리 올림픽 동메달 땄다…삼성생명에서 뛴 43세 로렌 잭슨의 올림픽 사랑
국가대표란 무엇인가? 왜 올림픽에 나가는가?
스포츠 역사상 호주 여자농구의 로렌 잭슨만큼 절절한 해답을 준 선수는 없을 것이다. 오로지 ‘나의 운동’에 대한 사랑으로 15번의 수술과 ‘홀로 엄마의 죄책감’을 극복하며 파리올림픽에 출전했다. 국가대표는 누가 시켜서나 보상을 바라며 하는 것이 아니다. 실력이 되는 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위해 당연히 하는 것임을 잭슨은 일깨워 준다.
농구는 빠르면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운동.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다. 홀로 두 아들을 키우는 43세 잭슨은 12년 만에 나간 파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 그녀는 올림픽 농구 역사에서 ‘남녀 통틀어 가장 나이 많은 선수’였기 때문. 그러나 잭슨의 위대함은 그런 숫자에 있지 않다.
잭슨은 오래 동안 호주 여자농구의 ‘역대 최고(GOAT: greatest of all time)로 불려 왔다. 여제‘ ’황제‘ ’황태자‘ 등이 널린 대한민국 스포츠와는 달리 외국 매체들은 그런 수식어를 잘 붙이지 않는다. 외모나 신체특징을 딴 별명은 더욱 그렇다. 객관성 부족한 그런 단어들이 자칫 선수 사이 위화감 조성이나 인격 비하가 될 수 있어서다.
그러나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호주올림픽위원회는 잭슨을 ‘역대 최고’라 공식 표기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객관의 사실로 입증했기 때문. 잭슨은 세계 최고 농구선수 가운데 한 명이다.
잭슨은 5개의 올림픽 메달과 4개의 월드컵 메달 이외에 호주프로리그에서 7번 우승하고 4번 최우수선수가 되었다. 미국프로농구 신인선발 1순위. 3번 최우수선수, 2번 우승. 스페인·러시아에서 뛰면서 유로리그 우승도 3번이나 했다. 호주 농구 명예의 전당,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호주농구협회 회장은 “잭슨은 모든 농구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라고 했다. 잭슨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삼성생명 비추미에서 뛰었다. 2007년 리그 최우수 선수.
■어떤 부상에도 국가대표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cm 잭슨은 치열한 골밑 몸싸움을 벌여야 하는 센터. 부상은 악마처럼 따라 다녔다. 15년 동안 수술을 무려 15차례나 받았다. 이 세상 어느 운동선수가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었을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9세에 국가대표가 된 뒤 20여 년 동안 한 번도 국가대표를 마다하지 않았다. 올림픽이든 세계대회든 부름을 받으면 갔다. 농구를 하는 한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겼다. 늘 부상을 달고 뛰면서도 5번 올림픽에서 은메달 3개와 동메달 2개를 땄다. 월드컵에서 금메달 1개와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극심한 부상으로, 두 아이와 떨어질 수 없어 2번 은퇴를 했다가 돌아왔다.
부상은 잭슨의 농구 인생 그 자체다. 2008년 올림픽에서 다쳐 발목 수술을 했다. 09년 척추 2개 피로골절. 10년 아킬레스건 부상. 11~12년 아킬레스, 고관절, 오른쪽 무릎 등 여러 차례 수술. 그래도 12년 런던 올림픽에 나가 동메달을 땄다. 14년 다시 발꿈치와 관절염 수술. 16년 전방십자인대 수술. 끊임없는 부상 탓에 심한 우울증에도 시달렸다.
더 이상 부상을 견디기 어려워 16년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은퇴했다. “국가대표로 할 만큼 했다. 소속 구단에서만 뛰겠다”는 은퇴가 아니었다. 운동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앞으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진단까지 받았다. 그러나 5년 재활 끝에 사회인 농구로 돌아왔다. 농구를 진정 사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그동안 두 아들을 낳았다.
농구협회는 21년, 마흔 살 잭슨에게 이듬 해 월드컵에 뛰어 달라 했다. 올림픽 대비. 잭슨은 후보밖에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민 끝에 그 부름에 응했다.
결정을 어렵게 만든 것은 강도 높은 훈련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결심을 어린 두 아들들에게 말하는 것. 다섯 살 큰 아이는 엄마를 ‘거짓말쟁이’라 불렀다. 이제 농구선수를 하지 않고 늘 같이 지내겠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 잭슨은 “아이들은 올림픽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희생이었다, 정말 잔인했다. ‘엄마의 죄책감’에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러나 월드컵 3위를 했다. 그 결정전에서 30점을 올렸다.
불운이 다시 잭슨을 덮쳤다. 호주리그에서 발가락이 부러졌다. 어렵게 복귀했으나 23년 2월에는 또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두 번 수술. 그러나 8개월 뒤 돌아왔다. 놀라운 회복.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아이들이었다. 오로지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재활에 매달린 덕분이었다.
■“엄마의 죄책감”에 은퇴했으나...
잭슨은 지난 2월 파리올림픽 예선전을 위한 국가대표 부름도 받아들였다. 도쿄에서 메달을 놓친 호주는 잭슨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선발권을 딴 뒤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이제는 국가대표보다 아이들이었다. 더는 아이들과 떨어질 수 없었다
“아이들을 제대로 돌 볼 수 없다는 ‘엄마의 죄책감’은 너무나 컸다. 어떤 부상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재활하는 동안 아이들이 너무나 많은 희생을 해야 했다. 이제 또 떨어지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협회는 올림픽 동안 그녀의 부모가 파리에서 아이들을 돌보도록 돕겠다며 설득했다. 그것이 특혜라면 특혜였다. 잭슨은 마침내 12명에 뽑혔다. 감독은 ”로런의 복귀는 농구에 대한 사랑의 증거“라고 했다.
잭슨은 홀로 두 아이를 돌보며 올림픽 준비를 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점심까지 준비했다.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데려다 준 뒤 연습을 시작했다.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온 뒤 스포츠 활동에 같이 가야 했다
“쉴 틈이 없었다. 매일 반복. 하지만 농구는 나에게 해방구였다. 삶을 더 충만하게 느끼게 했다.”
호주에서 여자프로농구선수는 고액연봉자가 아니다. 잭슨은 미국·호주에서 뛰었으나 두 나라는 프로의 원칙을 지키는 곳.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니 높은 연봉을 못 준다. 호주의 평균 연봉은 3900만 원. 한국은 1억1,500만 원이다. 한국의 최고 연봉 4억5000만 원. 세계 최고 선수인 잭슨의 연봉은 미국이나 호주에서나 1억~2억 원 수준이었다. 올림픽 메달에 큰 보상도 없다. 호주는 금메달 선수 2,700만 원, 동메달 선수는 1,350만 원가량을 줄 뿐이다.
그러나 잭슨은 경기에 뛸 만큼 건강하기만 하면 국가대표를 망설인 적이 없다. 그녀는 파리에서 “금메달 못 딴 것이 결코 아쉽지 않다. 올림픽은 특별한 여행이다. 메달과 관계없이 올림픽 마다 늘 다른 특별한 경험을 얻는다. 나의 몸 상태가 이런 기회를 다시 줄지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올림픽 출전 기회를 갖고 어린 선수들을 도울 수 있었으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많은 아픔을 겪고도 잭슨처럼 소박하고 담담하게 국가대표와 올림픽 출전의 의미·가치를 말할 수 있는 선수는 드물 것이다. 누가 그보다 더 진정성 있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동료 선수는 “로런은 위대함의 상징”이라고 존경했다.
[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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