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암울해도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 [프리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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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취재원을 만나면 근황을 나눌 겸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기자님, 요즘에는 뭐 취재하세요?" 최근에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대체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애를 낳으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애들 재우고 폰을 보다가 그런 뉴스들이 나오면 '저 집 부모는 어쩌나' 싶어서 숨이 콱 막혀요. 세상이 점점 흉측해지는 것 같아요. 기자님은 안 그러세요?" 저야 일이니까요, 평소라면 얼버무리며 넘어갔을 텐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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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취재원을 만나면 근황을 나눌 겸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기자님, 요즘에는 뭐 취재하세요?” 최근에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보자, 이번 주에는 교제살인 취재하고요. 지난주에는 훈련병 사망사고 취재했고, 그 전에는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 그 전에는 청소년 도박….”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 둘을 키우는 상대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애를 낳으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애들 재우고 폰을 보다가 그런 뉴스들이 나오면 ‘저 집 부모는 어쩌나’ 싶어서 숨이 콱 막혀요. 세상이 점점 흉측해지는 것 같아요. 기자님은 안 그러세요?” 저야 일이니까요, 평소라면 얼버무리며 넘어갔을 텐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전날, 하남 교제살인 사건 피해자의 친구들을 인터뷰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하남 교제살인 사건 피해자는 대학에서 첫 생일도 맞지 못한 채 살해당했다. 고작 19일 사귄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지 여섯 시간 만이었다. 피해자의 친구들은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할 시간을 쪼개 사건의 참혹함을 증언해주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세상이 더 후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제가 학교 다닐 때 대학가에 미투 운동이 번졌어요. 날마다 대자보가 붙었는데도 사실 바뀐 건 별로 없었어요. 피해자 대부분은 사과받지 못했고요. 가해자들은 여전히 ‘이렇게 산다더라’는 소문이 들려요. 그래서 결국 이런 일들까지 벌어지는 걸까요. 그때 더 열심히 싸웠어야 했던 것 같아요.” 취재원 앞에서 나 자신도 예상치 못하게 횡설수설했다.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선배들이 그렇게 목소리를 내주신 덕분에 지금 저희도 용기를 내서 인터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미투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면 2024년에도 제 친구의 죽음은 뉴스에 안 나왔을걸요.”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대답이었다. 그 뒤로 ‘기자님은 안 그러시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덧붙인다. ‘세상이 더 후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고쳐먹기로 했다고.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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