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슐랭]⑤ 기원전 1세기부터 시작…K뷰티 역사, 강남 한복판서 배운다
기원전 1세기부터 시작된 화장 문화 전시
창업주가 50여년 수집한 전시품 모아
해외 순회 전시로 원조 강남 스타일 전파
<미슐랭(미쉐린) 가이드는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레스토랑 평가·안내서입니다. 조선비즈는 미슐랭 가이드처럼 국내 기업과 기관이 운영하는 과학관과 박물관의 콘텐츠 ‘맛’을 평가하는 과슐랭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과학관, 박물관에 담긴 과학 정보와 함께 기업 직원들이 추천하는 근처의 맛집도 소개합니다. 과학과 문화를 배우며 맛집도 찾는 여행 가이드로 활용하길 바랍니다.>
한국의 화장품 산업을 의미하는 ‘K-뷰티’는 더 이상 한국의 것만은 아니다. K-팝 열풍을 타고 일본이나 대만, 미국, 유럽, 캐나다를 거쳐 중동까지 범위를 넓혔다. 미국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잉크우드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2032년까지 K-뷰티는 연평균 9.71%씩 성장할 전망이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K-뷰티 시장의 원동력을 화장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소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기원전(BC) 1세기부터 근대까지 한국의 화장 문화를 상설 전시한다.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창업주는 옛 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뜻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강조하며 2003년 박물관을 열었다. 최근에는 프랑스, 영국, 일본, 중국, 미국, 호주에서도 순회 전시를 진행했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던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빌딩 숲 사이에 자리 잡은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을 찾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5층 상설 전시실의 첫 인상은 ‘작지만 알차다’였다. 공간은 크지 않지만 한국의 전통 화장에 사용된 도구와 재료, 근대 화장품, 장신구가 알차게 전시돼 있어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했다.
5층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6층 특별전시 공간에서 일본과 중국 여성들이 사용했던 장신구와 화장도구도 볼 수 있다. 6층 맨 안쪽 공간에서는 지금의 미니 화장대라고 볼 수 있는 경대를 기획 전시하고 있었다. 기획 전시 공간은 연 2회 열리며 오는 9월에는 전통 신발로 주제가 바뀔 예정이다.
◇전통과 현대 화장 차이는 성분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 전통 화장법이 눈에 띈다. 가만히 둘러보고 있으면 세안을 하고 스킨, 로션을 바르고 선크림이나 파운데이션, 색조 화장품을 쓰는 패턴은 시대에 상관없이 모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민정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학예사는 “전통과 현대 화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며 “가장 큰 차이는 성분”이라고 설명했다.
전통 화장은 천연물을 바탕으로 한다. 옛사람들은 콩이나 팥가루를 물에 넣어 얼굴을 씻고, 수세미즙이나 오이즙을 스킨처럼 사용했다. 씨앗의 기름인 향유(香油)는 얼굴이나 입술, 머리에 발라 보습하는 데 썼다. 얼굴을 하얗게 하는 분(粉)은 쌀가루에 황토 가루를 섞어 톤을 맞추고 발랐다. 붉은색 꽃잎이나 광물은 입술과 볼에 색을 내기 위해 곱게 갈아 바르곤 했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전통 화장법과 함께 피부나 미용과 관련된 기록들이 남아있는 동의보감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화학 물질을 첨가한 화장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1920년 최초의 공장 생산 화장품인 박가분(朴家粉)이 등장했다. 두산그룹의 창업자인 박승직이 만들기 시작한 박가분은 납화합물인 백연(白鉛)을 사용했다. 납 조각에 식초를 처리하면 하얀 가루인 백연이 얻어지는데, 이를 천연 가루에 섞어 만들었다.
하지만 박가분은 출시된 지 10여 년 만에 자취를 감췄다. 분의 발림성을 높이기 위해 추가했던 납 성분이 중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피부가 괴사하기도 했다. 전통 화장에서 붉은색을 내기 위해 사용했던 광물에도 몸에 해로운 중금속이 들어있어 장기간 사용하면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화장품과 화장 도구 같이 진화
화장법에 대한 내용을 보고 나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화장이나 머리를 단장할 때 썼던 도구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남성의 꾸밈 도구 중에 길쭉한 자 모양의 막대가 눈에 들어왔다. 손톱을 다듬는 기구인가 싶었지만, 상투 머리를 할 때 삐져나오는 잔머리를 밀어 넣기 위한 살짝밀이였다. 당시 남성들도 꾸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거울이 없던 때 사용했던 동경(銅鏡)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청동제 거울인 고려경이다. 동경도 없던 시절에는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비친 얼굴을 보면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대야에서 동경, 거울로의 점진적인 진화가 화장 문화를 발달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전시실의 한가운데에는 삼국시대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쓰이던 화장 용기가 전시되어 있다. 삼국시대는 토기를 쓰다가, 고려시대는 청자, 조선시대는 분청과 백자로 발전했다. 일반 도자기와 같지만 매우 작은 게 특징이다. 옛날에는 방부제 없이 천연 재료로 화장품을 만들다 보니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만들어 저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은으로 만든 용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화장과 함께 스스로를 꾸미는 데 쓰였던 비녀와 화관, 족두리, 한국 고유의 향이 달린 노리개와 같은 장신구도 전시돼 있다. 한국의 향 문화 역시 화장 문화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오래됐다. 박물관은 동의보감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라 한국 고유의 향을 만들고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다만 단체 예약제로만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수집광’ 창업주가 만든 박물관, 미술관도 볼거리
‘화장’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화장 도구는 물론 장신구까지 모아 전시할 수 있는 것은 코리아나 화장품 창업주인 유상옥 회장 덕분이다. 김 학예사는 “전시품은 유상옥 회장이 50여 년 동안 모은 것”이라며 “전시물들은 모두 실물로 복제품이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
유상옥 회장의 수집은 코리아나 화장품을 창업하기 전 동아제약에서 일할 때부터 시작됐다. 제약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한의학에서 주로 쓰는 약장, 약저울을 모으다가 동아제약의 라미 화장품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관심사가 화장으로 바뀌었다. 유 회장은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봤던 화장품 전시관이 부러워 직접 전통 화장과 관련된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그리고 1988년도 코리아나 화장품을 창업한 뒤 수집한 것을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2003년 박물관을 열었다.
코리아나 화장품 본사가 충남 천안에 있는 반면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이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것도 유상옥 회장의 선구안 덕분이다.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인사동을 포함해 여러 지역을 둘러보다 지금 자리가 마음에 들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화장박물관이 있는 건물에는 코리아나 미술관이 있다. 코리아나 미술관은 오는 11월 23일까지 일상에 스며든 불안을 조명하는 ‘불안 해방 일지’ 기획전을 연다. 정규 전시 해설 프로그램과 퍼포먼스, 관객 참여 프로그램, 토크 프로그램도 열리니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조금 더 비용을 내고 화장박물관과 미술관을 함께 둘러보길 추천한다.
화장박물관이 있는 건물은 둘러볼 곳이 많지만 주변에 비슷한 성격의 공간이 없는 점은 아쉽다. 주변에 박물관이나 미술관, 볼거리들이 몰려 있다면 한 곳을 둘러보다 다른 곳으로 자연스레 옮겨가게 되지만, 대부분 상업 빌딩이라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혹시 코리아나 화장박물관만으로 강남에 가기에 부담스럽다면 가보고 싶은 맛집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바로 앞 도산공원 주변은 맛집이 많기로 유명하다. 김 학예사는 “도산공원에도 유명한 집이 많고, 개인적으로는 장사랑이라는 한식집을 추천한다”며 “유명한 맛집의 대기 시간이 길다면 맛도 있고 대기 시간은 비교적 짧은 장사랑이 좋은 선택”이라 말했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과슐랭 별점
자체 콘텐츠(1.5/3) ★☆ 소장 전시품과 설명은 알차지만 체험 프로그램이 제한적
주변 연계(1.5/2) ★☆ 건물 내 볼거리를 함께 둘러보면 시간 순삭!
전체 평가(3/5) ★★★ 규모에 비해 볼거리가 다양한 가성비 높은 박물관, 구석구석 꼼꼼히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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