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죽어라 일하는 민중이 보수적이라는 역설

최재봉 기자 2024. 8. 1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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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20세기 민중 구술 자서전에 투영된 민중상
가부장제 만연, 성차별, 직업 자긍심 희박
“지식인의 이상적 민중상 재검토해야”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인파(1965). 국가기록원 소장.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민중은 이야기한다
20세기 한국 민중 서사
김경일 지음 l 성균관대학교출판부 l 3만3000원

‘민중’은 백성, 서민, 인민 등과 그 뜻이 적잖이 포개지는 말이다. 민초, 기층민 또는 학술 용어인 서발턴 같은 말들과도 비슷한 관계를 지닌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중은 착취와 억압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그런 질곡을 깨부수고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는 투쟁의 주체로 부각되었다. 민중사관, 민중문학, 민중신학 등은 모든 사안을 민중의 관점에서 다시 보고 새롭게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렇지만 민중 개념이 처음부터 이렇게 진보적이고 저항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 통치 당국은 ‘경찰의 민중화’ ‘민중 보건’ 등을 통해 식민 지배를 합리화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총후 민중’ ‘반도 민중’ 같은 말들로 전시체제 대중 동원을 꾀했다. 한편으로는 1925년에 기획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에서 보듯 사회 운동권에서 민중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다. 해방 공간에서 좌파가 민중보다는 ‘인민’을 자주 사용하자 ‘민중’은 자연스럽게 우파의 전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중의 재발견이 이루어진 뒤에는 진보와 좌파에서 이 용어를 전유하여 1980년대의 민중주의로까지 이어졌다.

수색공민학교 천막 학교 성금품 전달식(1961). 서울역사아카이브 소장.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의 실제 삶은 어떠했을까. 사회학자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쓴 ‘민중은 이야기한다’는 구술 자서전과 인터뷰 기사를 토대로 민중의 삶을 재구성한다. 1960~70년대 잡지 신동아에 100회에 걸쳐 연재된 ‘오늘을 사는 한국의 서민’ 시리즈, 1980년대의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전20권, 1982~1991), 그리고 21세기에 나온 ‘한국민중구술열전’(전47권, 2005~2011)과 ‘20세기 한국민중의 구술자서전’(전6권, 2005)을 일차 자료로 삼고 다른 자료들을 참조했다.

석산섬유공업주식회사 여공들(1956). 국가기록원 소장.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민중을 민중이게 하는 양대 축은 가난과 노동이다. 경제적으로 빠듯하고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해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지니지 못한 이들이 몸을 쓰는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이은 것이다. ‘한국민중구술열전’(민중열전)의 주인공 47명 중 유일한 일본인을 뺀 나머지 한국인 46명의 경우 무학에서 초등학교 졸업까지의 학력이 전체의 70%가 넘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신동아 ‘서민’ 시리즈에 나오는 기술자 56명 가운데에서도 무학이거나 초등학교 중퇴 또는 졸업 학력을 가진 사람이 역시 70%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이들은 그야말로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가릴 처지가 안 되었고,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만 지속되는 불안정한 성격”을 지닌 다양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중열전 제26권 주인공 황태순은 각종 농사일을 필두로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막노동과 하역 작업 인부를 거쳐 1970년대에는 사우디에서 항만 하역 작업을 했으며 돌아와서는 농기구상, 섬유공장, 가구공장, 자동차 부품회사, 건설 현장 등의 영세 사업장에서 막일과 경비일을 전전했다.

삼척탄광 광부(1976). 국가기록원 소장.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온종일 “질통 메고 운반하는” 일을 하다가 빨라야 밤 10시에 도착해서 잠자는 시간도 제대로 없었을 정도로 “죽자 사자 일해”도(민중열전 제24권 홍성두)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서 부인과 어린 자식들까지 가족 모두가 부업 전선에 나서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 나가면 “길거리에서 쇳덩어리라도 주어오는 그런 버릇”(민중열전 제9권 정원복) 또는 “신앙과 같은 낭비 혐오증”(‘서민’ 시리즈 기록자)은 이런 지독한 가난이 남긴 흔적이라 하겠다. ‘서민’ 시리즈의 기술자 주인공들은 대체로 “이제 염전이라면 지긋지긋”(염수장 김재순)하다거나 “모래밭에 혀를 박고 죽어도 내 아들을 통꾼(=종이 뜨는 기술자)은 안 만들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자신의 기술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희박하다.

충청남도 도지사 초청 합동 회갑연(1962). 공공누리

결혼은 연애가 아닌 중매결혼이 대부분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당사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제 결혼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민중자서전’ 제4권 주인공 이규숙은 남편과 서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고 시어머니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으며, “시어머니가 날짜를 봐서 들여보내는 날에나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민중자서전’ 제9권 주인공인 최소심은 열일곱 나이에 열두 살 더 많은 남자의 첩으로 들어간 것을 비롯해 세번의 결혼 모두 첩의 신분이었는데, 법률상으로는 첫번째 남편의 부인으로 되어 있어서 그 남편과 다른 여성 사이에서 나온 아이들이 자신의 자식으로 호적에 올라 있고, 실제로는 세번째 남편과 해로하면서 역시 자기 소생이 아닌 이 남편의 아이들을 손수 키우며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유지했다.

가내 수공업(1960). 공공누리

가부장제와 아들 선호 의식은 확고해서 “아내보다는 부모나 형제를 우선시”하기 일쑤였으며, 자식들 가운데 한둘을 택해 고등 교육을 시킬 때에도 “거의 언제나 장남에서 시작하여 다음 아들들로 이어졌다. 여성은 여기에서 배제되는 것이 상례였다.” 여성은 교육 이전에 사람다운 대접에서부터 소외되기 일쑤여서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민중자서전) 제6권 주인공 김점호는 “옛날엔 어른이라 카마는 하늘이고 미늘(=며느리)이라 카는 거는 땅바닥에, 진짜로 고만 벌거지(=벌레)보다 쪼매” 나은 존재로 취급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체제 순응적이며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정치 같은 건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서민’ 시리즈의 유리공 최용배)는 식의 태도가 흔했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기 일쑤였다. 김경일 교수는 “오랜 시간에 걸친 수탈과 지배, 식민 지배와 민족 이산, 전쟁과 군사 독재 같은 역사의 톱니바퀴가 민중론의 주류를 이루는 주체와 진보, 급진의 요소들을 서서히 갈아내버렸다”고 상황을 해석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지식인의 기대나 이상의 투영이거나 어긋남일 수도 있다”며 기존의 민중 인식을 재정향하고 그에 대한 대안 서사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고 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민중은 이야기한다’의 지은이 김경일 교수.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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