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되기를 선택한 후 엄마 하기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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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년 혹은 1651년, 스페인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의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작가가 되고 천재, 멕시코의 열 번째 뮤즈, 아메리카 최초의 페미니스트 등의 긴 이름을 부여받는다.
또 자식은 인생의 기쁨이라고 모성을 찬양하면서도 아이들을 키울 때의 '불치병 같은 피로감'을 고백하며 딸의 비출산에 공감하는 라우라의 엄마가 있고 중증장애아인 이네스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는 보모 마를레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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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과달루페 네텔 지음, 최이슬기 옮김 l 바람북스(2024)
1648년 혹은 1651년, 스페인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의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작가가 되고 천재, 멕시코의 열 번째 뮤즈, 아메리카 최초의 페미니스트 등의 긴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스스로는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여자’를 자처했던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라 크루스의 이름을 딴 이네스가 오늘 태어난다.
배 속 딸에게 페미니스트 시인의 이름을 붙여준 엄마 알리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 라우라와 함께 비혼 비출산을 주장했지만, 비출산을 확고히 하기 위해 난관 수술을 감행한 라우라와 달리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난임 시술을 받으며 간절히 아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어렵게 가진 아기의 뇌가 자라지 않아 출생과 거의 동시에 사망할 거라는 의료진의 진단을 접하고 알리나는 아기와의 이별을 준비한다.
출산 준비가 곧 애도의 시작이 되고 알리나는 아기에게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면서 동시에 정성껏 꾸민 아기방을 치우고 장례식장을 예약한다. 제왕절개 수술을 예약하면서도 “저를 재우지 말아 주세요. 저는 이네스를 만나고 싶어요. 얼굴을 보고, 가능한 모든 시간 동안 함께 있어요.”라고 신신당부하며 이네스와의 짧은 만남을 준비한다.
그렇게 ‘오늘’ 이네스는 태어나고 의료진의 예상과 달리 질긴 생명력을 보이며 살아남는다. 슬픔과 애도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던 이야기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방향을 튼다. 딸이 일찍 죽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때의 고통은 ‘평생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약을 복용시켜야 하는 말기 환자를 돌보듯’ 딸을 책임져야 한다는 공포로 바뀐다.
소설 속에는 모두 다섯 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우선 이네스의 엄마 알리나가 있고, 어른들 때문에 일찍부터 상처 입고 폭력을 답습하는 어린 아들을 키우느라 깊은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진 라우라의 이웃 도리스가 있다. 또 자식은 인생의 기쁨이라고 모성을 찬양하면서도 아이들을 키울 때의 ‘불치병 같은 피로감’을 고백하며 딸의 비출산에 공감하는 라우라의 엄마가 있고 중증장애아인 이네스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는 보모 마를레네가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아이들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폭력적인 옆집 아이 니콜라스를 집에 들이고 돌봄에 함께하는 라우라 역시 명백히 ‘엄마 하기’를 수행 중이다.
이네스는 출생 전에 사망 진단을 내린 의료진을 나무라듯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여러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천천히 목을 가누고 근육을 단련하고 듣고 웃고 표현한다. 이야기는 출산과 비출산 사이 선택을 강요하거나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상 밖의 불행이 닥쳐왔을 때 무너지는 사람이 있고 그 무너진 사람 옆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함께함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담담히 전할 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신념이 있고 각자 사정과 선택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 모두 이네스를 만났고 그 만남이 삶을 바꿔냈다는 것이다. 변화는 단순한 행이나 불행 또는 운명으로 설명할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개입한다. 다섯 명의 엄마들은 선택 이후에 또 선택을 거듭하며 살아간다. 마치 조용히 안간힘을 쓰며 생존의 길을 가는 이네스처럼 말이다.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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