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리모델링, 갈아엎는 게 정답은 아냐'...수십 년 된 타일도 남긴 '갈현동 감나무집'
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건축을 '업'으로 삼은 이라면 뭉근하게 꿈꾸는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 누군가의 집을 짓기 위해 분투하지만 정작 자기 집을 짓는 꿈은 현실적인 이유로 밀리기 십상이다. 건축 설계 일을 하는 조지영(47)씨도 그랬다. 고객의 주택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스케줄로 촘촘한 하루를 살다보니 '내 집 짓기'라는 숙제는 기약 없이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전세 계약 만료날이 슬금슬금 다가오던 차에 현실적인 선택지를 고민하던 지영씨는 '짓지 못할 거면 고쳐보자'는 생각으로 오래된 집을 구했고 서울 은평구 오래된 주택가에서 '빈집'을 발견했다. 50년 전에 지어진 집의 대문이 열리는 순간 매력이 폭발했다. 아름드리 감나무와 단풍나무가 감싸안은 작은 마당, 1·2인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담한 내부 공간이 마음에 꼭 들었다. "워낙 건축 현장에 익숙하다 보니 낡고 빈 집에 대한 선입견은 없었어요. 살 만한 곳으로 고칠 수 있을지,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가 중요했죠. 이 집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약 직전 건축계 동료들을 불러 집을 둘러보면서 확신이 생겼다. 집을 본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고쳐볼 만하겠다'며 지영씨의 판단에 힘을 실어 줬다. "건축 일을 하니 잘 알잖아요. 오래 방치된 집을 살 만한 집으로 고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현업과 병행할 자신이 없어서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를 찾았죠. 집을 고친다면 꼭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도 했고요." 일찌감치 건축주의 낙점을 받은 건 후배 건축가인 정승환 오구사 건축사사무소 소장이었다. 정 소장도 집을 둘러보며 매매 결정에 힘을 보탰던 터. 집을 본 이후 집의 잔상이 이상하리만치 머릿속을 맴돌더란다. "제안을 받고 몇 차례 거절을 했어요. 그런데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장면들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떠오르더라고요. 이쯤 되면 해야겠다 싶어서 하겠다고 했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후라서 첫 독립 프로젝트가 됐으니 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집이 됐어요." 그렇게 건축계 선후배 사이로 만난 두 사람이 합심해 매만진 집은 '갈현동 감나무집'(대지면적 139㎡, 연면적 74㎡)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거실이라는 새로운 구심점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1년 넘게 방치된 건물을 되살리는 건 건축 베테랑에게도 쉽지 않았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건축비도 문제였다. 정 소장은 "건축주의 요구는 '최소 비용으로 거주 가능한 집으로 만들어달라'는 거였는데, 공사비의 한계로 레이아웃을 크게 바꿀 수도, 디자인에 욕심을 부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며 "대신 거실만큼은 꼭 새로 만들고 싶어서 끈질기게 건축주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가장 단순한 나무 구조체를 만들고 큰 창을 계획했다. 바깥 풍경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긴 코너 창이다. "'어둡다'가 집의 첫인상이었어요. 이전 집은 거실 없이 방으로만 구성되고 창도 작아서 빛이 거의 들지 않았거든요. 거실을 만든 건 기능을 더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채광을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죠. 유리로 마감한 처마도 빛을 최대한 내부로 들이기 위한 장치예요." 그리하여 집 중앙에 3평 크기의 거실이 새로 생겼다. 온실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마당 방향으로 돌출된 낮은 층고의 거실은 집의 얼굴이자 가장 쓰임 많은 공간이라는 건축주의 설명이 뒤따랐다. 지영씨는 "정 소장이 거실 증축을 얘기했을 땐 망설였는데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집에 있을 땐 자는 시간을 빼고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에서 보내는데, 가만히 앉아서 나무만 바라봐도 행복해지는 공간"이라고 했다.
거실에선 집의 터줏대감인 단풍나무가 한눈에 보인다. 건축주는 마당에 있던 오래된 나무 네 그루 중에 단풍나무와 감나무를 살렸는데, 단풍나무는 거실 차경의 중요한 요소다. 감나무는 현관의 오브제다. 건축가는 두 나무가 만드는 느슨한 풍경을 집 안으로 들이고자 유리창에 더해 현관문도 유리로 만들었다. 덕분에 집 안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두 나무로 향한다. "기능 이상의 가치를 찾아내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죠. 이 집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꼭 필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는 배경이 됐어요."(정승환)
느슨하게 채워지는 집의 밀도
거실 외에 나머지 부분은 원래 집의 정취를 최대한 살렸다. 아치 형태의 대문이 있는 벽돌 담장을 그대로 두고, 마당에 깔려있던 수십 년 된 바닥 타일은 보관했다가 다시 깔았다. 지붕 형태도, 창문 크기도 유지했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담담하고 당당하게 자리를 지킨 오래된 집에 대한 마땅한 존중이라고 할까. "옛집을 리모델링할 때 매끈한 현대식 재료로 바꾸기보다 적재적소에 흔적을 남겨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꼼꼼하고 집요하게 디자인 요소를 살피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선 욕심을 버리고 세월이 응축된 집의 모습과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담으려고 했어요."(정승환)
그런 질서 속에 내부 공간 배치도 건축주의 필요에 따라 소소한 변화만 줬다. 20평쯤 되는 작은 집이지만 욕실은 넉넉하게 만들었다. 방 세 개는 두 개로 줄이고, 구석에 있던 부엌의 거실과 마주 보는 가운데 자리로 옮겼다. 부엌, 다이닝 공간, 거실이 한 공간에 놓이면서 넓어 보이는 효과를 누리게 됐다. 정 소장은 "아파트 평면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구조를 따르되 층고를 최대한 끌어올려 개방감을 키웠다"며 "흔한 구조이지만 층고가 높아 전혀 다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변함없이 변하는 집, 그리고 동네
"꽤 오랫동안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지내지 않을까 싶어요." 지영씨는 집 안팎을 돌아보며 앞으로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옛집에서 나온 부재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오래 뿌리내린 나무 두 그루는 얼마 전 보기 좋게 다듬었다. 집주인인 지영씨, 함께 사는 친구, 반려묘의 일상은 '새로워진 옛집'에 녹아들었다. 동네의 역사, 집의 서사를 자기식대로 보존한 작은 집은 지난해 서울시와 서울시건축사회가 주최한 '우리 동네 좋은 집 찾기' 공모에서 좋은 옛집 부분 '은상'을 받았다.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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