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8월의 단상

경기일보 2024. 8. 1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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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광복 직후 여러 사회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뜻깊은 역사는 조선적십자사의 재건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적십자운동의 시작은 1905년 고종황제의 결단으로 대한적십자사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지만 이내 나라를 잃은 후 본격적인 적십자 활동은 1919년(임시정부는 이해를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정했다) 8월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하면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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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회장

1945년 8월 광복 직후 여러 사회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뜻깊은 역사는 조선적십자사의 재건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적십자운동의 시작은 1905년 고종황제의 결단으로 대한적십자사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지만 이내 나라를 잃은 후 본격적인 적십자 활동은 1919년(임시정부는 이해를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정했다) 8월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하면서 이뤄졌다.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의 교두보와 같은 조직으로 적십자회를 설립하면서 초대 회장(총재)에 이희경, 부회장에 안정근, 그리고 명예총재는 서재필, 고문에는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문창범 등이 추대됐다.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출발한 적십자운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고 국제적십자사의 공인을 받아 임시정부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은 또 다른 목적이었다.

이 운동은 상하이에서 시작해 미주지역에 특파원을 파견해 지부를 결성, 일본의 식민 통치와 함께 적십자운동으로 포장한 일본적십자를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인(韓人)으로 만일 적십자회원이 아닌 자 일인(日人)과 여일(如一)하다”라며 재외교포들의 적십자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이후 미주지역은 물론이고 캐나다, 멕시코, 쿠바, 러시아 등지에서 벌인 독립만세운동은 모두 적십자와 함께한 투쟁이었다.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광복한 이후 국내에서 김재옥을 창설준비위 원장으로 해 결성 준비에 들어갔다. 마침내 1947년 3월16일 열매를 맺어 ‘조선적십자사’라는 이름으로 발족하게 됐다. 그해 5월28일에는 조선적십자사가 공식 출범하면서 총재에 김규식, 부총재에 안재홍, 그리고 집행위원에는 백상규 이갑수 등이 맡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당시 적십자사는 비록 짧았지만 남북이 나뉘어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남북이 함께할 수 있었던 역사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면서 대한적십자사도 국가적 기관으로 1949년 10월27일 새역사를 시작해 명예총재는 이승만 대통령, 명예부총재는 이범석 국무총리, 그리고 총재는 양주삼, 부총재는 변영태 유각경 등이었다.

그런데 양주삼은 일제강점기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초대 총리사를 지낸 이후 1930년대에는 신사참배에 앞장섰고 신도들에게 ‘충량한 신민’이 되라고 강연하며 학도병 지원을 앞장서 독려하는 등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가 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역사였다.

인도주의와 세계평화를 위해 설립돼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던 대한적십자사에 양주삼 총재를 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인사였다. 독립기념관장의 임명을 놓고 사회적 물의가 빚어지고 친일파와 ‘밀정’의 득세를 우려하고 있는 역사 현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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