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 수도자를 지켜주는 성모(聖母) 되시니
삼한(三韓) 땅은 넓고 갈 곳은 많다. 전 국토가 노천 박물관인 까닭이다. 한때 수몰될 뻔한 위기까지 겪었지만 지역민과 종교·문화계의 노력으로 지켜낸 대구 군위 인각사(麟角寺)를 뜨거운 여름날 몇 주 간격으로 세 번이나 찾았다. 두 번은 공식 행사 때문이지만 나머지 한 번은 하계 휴가를 함께한 도반들과 따로 일정을 만들었다.
뙤약볕 아래 ‘일연선사 모친산소 1km’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수레 한 대가 지나갈 만한 산길에서 풀을 헤치고 몇 차례 물 없는 계곡을 건너야 했다. 이를 선인들은 ‘발초첨풍(撥草瞻風)’이라 했다. 풀을 밟으면서 바람을 헤치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몇 년 전 동양 고전을 공부하는 동호인들과 중국 강남 지방을 찾았을 때 바위에 붉은색으로 새겨진 ‘첨풍(瞻風)’이란 글씨를 만났던 기억까지 떠오른다. 다시 마른 계곡을 건넌 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경사로 이루어진 마지막 300m는 그야말로 깔딱 고개였다. 다행이 사다리형 인공 나무 계단 덕분에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덱이 끝나는 자리에 있는 소박한 작은 무덤 앞에서 정성 다해 두 손을 모았다.
일연(一然·1206~1289)선사의 역저인《삼국유사》〈효선(孝善)〉편에는 신라의 진정(眞定)법사 어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모친 때문에 출가를 망설이는 아들에게 빨리 떠나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면서 내쫓다시피 사찰로 보냈던 일화를 인용하면서 당신의 삶을 되돌아봤을 것이다. 선사는 어린 나이로 집을 나온 후 칠십을 훌쩍 넘기고서야 노모를 모시기 위해 인각사로 왔다.
하지만 이미 구십을 한참 넘긴 모친과 함께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 이듬해 별세했기 때문이다. 산소는 인근 앞산 능선의 앞이 툭 터진 그리고 볕이 잘 드는 곳에 모셨다. 몇 년 후 선사도 열반하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도탑 위치를 정해 주었다. 어머니 산소가 정면으로 보이는 맞은 편 산 아래 평지였다. 낙랑군부인이씨(樂浪郡夫人李氏) 묘소를 향해 항상 예(禮)를 올리는 형국을 만들었다.
주변을 거닐면서 땀을 식혔다. 전북 지방에 연고지를 둔 S스님과 김제 망경에 있는 진묵(震黙·1562~1633 조선) 모친 고씨(高氏) 부인 산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선사는 평생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사십구재 때 직접 지었다는 제문은 심금을 울리는 명문이다. 묘지는 훗날까지 관리를 염두에 두고서 접근성이 좋은 평지에 마련했다. 이른바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다. 자손이 없더라도 천년만년 향불이 끊어지지 않는 명당이다. 누구라도 벌초하고 참배한 후 향을 올리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기도터라는 입소문 덕분에 지금도 묘지 주변은 늘 정갈하다.
두 성소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위치는 한반도의 동서 지방인 영남과 호남이다. 묏자리는 각각 능선과 평지를 선택했다. 예우 방식도 달랐다. 일연선사의 부도는 망모석(望母石)이 되어 수백 년 동안 우러러보면서 직접 묘를 살폈다. 진묵선사의 향불은 대대로 타인의 손을 빌려 꺼지지 않게 하면서 묘를 관리하는 방법을 찾았다. 이후 두 어머니의 내리 사랑은 모든 수도자를 지켜주는 성모(聖母)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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