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韓서 더이상 반미로 표 못얻듯, 美서도 ‘코리아 패싱’ 주장 안먹혀”
“韓 좌-우파 모두 동맹 중요성 이해… 한국과의 교역은 미국에 생명줄
FTA-워싱턴선언으로 동맹 강화… G7, 韓에 영구 옵서버 부여해야”
9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의 한 오피스텔에서 만난 헨리 해거드 전 국무부 에너지국장은 대뜸 2024 파리 올림픽 이야기를 꺼냈다. 유창한 한국어로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메달 획득 현황을 줄줄 꿰고 있는 해거드 전 국장은 “한국인이 집중력이 높기 때문일 것”이라며 웃었다.》
외교관 시절 세 차례의 한국 근무를 거친 그는 국무부 내 대표적인 한국통으로 꼽혀 왔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지난해 한미 핵협의그룹(NCG) 창설에 합의한 워싱턴선언 등 한미 동맹의 주요 분기점마다 긴박한 외교 현장엔 늘 그가 있었다. 190cm가 넘는 키에 운동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다부진 체격에도 한국인 연장자를 만나면 언제든 먼저 ‘형님’을 외치고, 사투리를 걸쭉하게 구사할 줄도 아는 ‘푸른 눈의 한국인’이다. 지난해 5월 그가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공사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전 용산 자택에서 연 이임식 오찬은 그를 ‘친구’라고 부르는 국내 정치인과 학자, 기업인, 주한 대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올 6월 국무부를 떠난 그는 현재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세운 미국 정치전략컨설팅기업 웨스트이그젝 어드바이저스의 수석 고문이자 미 라이스대 베이커인스티튜트와 벨기에 브뤼셀자유대 외교안보전략센터(CSDS) 선임연구원으로 한미 관계를 다루고 있다.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그가 보는 한미 관계 쟁점과 전망을 들어 봤다.
―한국을 떠난 지 1년 정도 됐다.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보낸 2년간 조 바이든 대통령 방한과 윤석열 대통령 국빈 방미를 통해 한미 동맹이 한층 더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지난해 주한 미국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국무부 에너지국에서 한미일 에너지 협력 등 한국과 계속 일할 기회가 있었다. 한미 관계는 내가 가장 열정을 쏟는 분야이고, 그게 내가 올 6월 국무부를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는 컨설팅기업과 대학에서 한미 관계와 관련된 전략 컨설팅과 에너지 협력에 대한 업무를 하고 있다.”
―한국과는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게 됐나.
“대학(브라운대)을 다니면서부터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일하며 유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외교관이 되려면 아시아와 아시아 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을 선택한 것은 물론 분단된 한반도의 역사와 정치 상황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997년 영어 강사로 한국에 도착해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여행을 다니고, 합기도 체육관에 등록하고 산악회에 가입해 다양한 한국인을 만나고 한국을 배웠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와 비교해 한미 관계의 가장 달라진 점은….
“반미주의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 한국에선 1980년대 군사독재정부와 미국의 관계 때문에 반미운동이 활발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반미 정서가 일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 좌파든, 우파든 모두가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이는 마찰이 생길 때 큰 힘이 되고 한미 동맹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한다. 한국과 미국은 이제 서로 더 밀접한 이해관계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관계가 나빠져도 심각한 문제로 비화되지 않는다.”
―한미 동맹 강화에 가장 중요한 조치는 뭐였다고 보나.
“안보 동맹이었던 한미 동맹은 이제 경제 동맹이자 기술 동맹, 미래를 위한 동맹이 됐다. 지난 10년간 이룬 이런 한미 동맹의 획기적인 진전은 한미 FTA가 아니었다면 거두기 어려운 성과라고 생각한다. 한미 FTA를 통해 양국 관계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강력한 동맹이 됐다. 이어 지난해 강력한 안보 동맹 관계를 명문화하고 강화한 워싱턴선언으로 한미 동맹은 한 번 더 업그레이드됐다.”
―미국 대선 이후 북한 비핵화 문제는 어떻게 될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추진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북-미 간 직접 협상이다. 트럼프 행정부 이전에는 미국 정부가 북한과 대화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면 모든 상원의원이 ‘끔찍한 일’이라고 비판하고 들고일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성 김 전 대북특별대표가 직접 북한에 메시지를 보내려 한다고 발표해도 누구도 반발하지 않는다. 지금 북핵 문제의 가장 큰 장애물은 북-러 관계다.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큰 힘을 실어주며 내건 조건은 한미와 협력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려운 걸림돌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기회만 생긴다면 과거 보기 힘들었던 외교적 기동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한과 주한미군 철수를 논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북한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정치적 논쟁거리(political football)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는 좋은 이슈다. 하지만 북-미 대화가 한미 관계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더 이상 표가 되지 않듯이 ‘코리아 패싱’(한국 패싱)은 미국에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한국과의 교역은 이제 미국 경제의 생명선(lifeblood)이다. 더욱이 한국은 미국 글로벌 전략의 파트너다. 북-미 대화가 동맹 구조의 변화나 주한미군 군사 태세, 무역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미 의회에서도 한국에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핵무기를 더 갖는다고 해서 한국이 전쟁에서 이기거나 더 안전해지는 건 아니다. ‘미국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를 쓸 것이냐’ 또는 ‘로스앤젤레스를 포기하고 부산을 지킬 것이냐’ 등의 질문은 잘못된 이분법(false choice)이다. 한국에는 미국인 20만 명이 살고 있다. 미국은 한국을 지킬 것이다. 미국은 이미 사방에 핵잠수함과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 한반도에 더 가깝게 전술핵무기를 배치하면 오히려 더 위험해질 뿐이다. 북핵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북한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 또 어떻게 하면 한국과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을 안전하게 지킬 것이냐다. 단순한 핵무기 재배치로는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주요 7개국(G7)이 한국을 포함한 G8로 확대돼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는데….
“G7이 다른 국제 협의체들과 다른 점은 모든 글로벌 현안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이 G7에 참여할지 여부에 앞서 먼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국 인권 등 모든 글로벌 현안에 명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과연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란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 한국은 G7과 이미 협력하고 있고 쿼드(QUAD)나 오커스(AUKUS) 워킹그룹 참여를 논의하고 있다. 그게 첫 번째 단계다. 다만 한국은 일부 민감한 사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중요한 글로벌 이슈에 대해선 대부분 G7과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G8 확대는 아직은 이르다고 보지만 G7이 한국을 초청할 준비가 될 때까지 한국에 영구 옵서버 지위를 부여하는 중간 단계가 현실적이고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야 하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이 G7에 참여할 준비가 돼 있느냐를 체크하기 좋은 가늠자다. 글로벌 한국이 되겠다는 열망은 오랫동안 있었다. 한국은 이미 문화와 상업,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글로벌 국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글로벌 한국이라는 목표가 슬로건을 넘어 한국이 글로벌 이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느냐는 점을 보여 주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
―미국 일각에선 중국 견제에 한국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여전하다.
“미중 경쟁과 관련해 한국은 이미 어느 편에 설지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동맹국은 미국뿐이다. 한국이 가장 많이 투자하는 곳도 이제 미국이다. 중국을 떠난 한국 기업들은 이제 동남아시아와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물론 한국에는 균형외교나 친중(親中)에 대한 정치적 수사는 아직 남아 있다. 이는 러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났다. 미국에 중요한 것은 행동이지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한국은 (미중 경쟁과 관련해) 이미 가장 영향력이 크고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한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행동과 정치적 수사에 불균형이 있을 수 있지만 한국이 안보는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이미 선택을 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미국 대선 이후 한국 투자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데….
“미국에 대한 투자가 한국에 좋지 않다는 생각은 믿지 않는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LG 등은 위대한 기업들이다. 그들의 판단에 대해선 경제정책에 관여하는 누구보다 신뢰한다. 미국은 핵심 산업인 반도체 및 태양광 등의 공급망 확보를 위해 한국, 일본 등과의 협력을 주도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도 엄청난 투자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서 이익을 내고, 미국은 제조업 기반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모두에 좋은 거래다. 한국은 모든 경제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몇 년간 11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가 이뤄졌다. 투자 결정이 내려졌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세부 사항들이 남아 있다. 공급망을 구축하고 대중국 제재나 수출통제에 맞추기 위한 조율이 필요하다. 비록 국무부를 떠났지만 앞으로도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내가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
헨리 해거드 전 국무부 에너지국장 |
△1972년 미국 메인주 출생 △1990∼1995년 미 브라운대 졸업 △1994, 1995년 NCAA 전국대학 조정 챔피언 △1997∼1998년 대한민국 진주시 영어 강사 △1999∼2024년 미국 국무부 외교관 △2020∼2021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유럽 보좌관 △2021∼2023년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공사 △2024년∼현재 웨스트이그젝 어드바이저스 수석고문, 미 라이스대 베이커인스티튜트 연구원, 벨기에 브뤼셀자유대 CSDS 선임연구원 |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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