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는 제 딸입니다”[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서 기어코 무지개를 찾으려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 살이었던 나, 싸구려 알전구가 반짝거리는 민속주점에서 서빙을 했다.
주방에서 엄마가 파전을 부쳐내면 살얼음 동동 뜬 막걸리를 주전자에 퍼담아 김이 폴폴 나는 파전이랑 들고 내갔다.
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서도 기어코 무지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갈 이들을 마음 다해 존중하고 싶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서 기어코 무지개를 찾으려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 살이었던 나, 싸구려 알전구가 반짝거리는 민속주점에서 서빙을 했다. 주방에서 엄마가 파전을 부쳐내면 살얼음 동동 뜬 막걸리를 주전자에 퍼담아 김이 폴폴 나는 파전이랑 들고 내갔다. 시릴 듯이 차갑고 델 듯이 뜨거운 손바닥을 짝짝, 씩씩하게 부딪치며 힘을 내던 곳. 엄마의 새벽 일터였다.
먹고살려고. 정작 먹고 사는 일일랑 포기한 채 일만 했으니 엄마는 나날이 앙상해졌다. 취객들이 떠날 줄 모르는 새벽의 주점에서 문간에 고꾸라지듯 기댄 채 꾸벅꾸벅 졸던 엄마. 그런 엄마를 깨우기 미안하고 속상해서 나는 부러 싹싹하게 굴었다. 내가 가진 건 어리고 어린 젊음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몹시 취한 손님이 계산하겠노라 내 앞에 섰다. 불쑥 아가씨 몇 살? 남자친구는 있냐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리 취할 정도로 많이 마셨고, 그 돈은 받아내야 했으니까. 나는 파르르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기만 하냐고 취객의 언성이 높아질 즈음, 내 어깨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이는 제 딸입니다.” 어느새 엄마가 다가와 있었다. 내 어깰 감싸는 엄마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엄마는 재차 말했다. “제 딸이에요.”
잠시 정적이 감돌더니 취객은 거칠게 계산하고 돌아갔다. 나는 엄마를 바로 볼 수 없었다. 대걸레를 들고 나와 애꿎은 바닥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기름때에 찌들어 깨끗해지지 않는 주점 바닥을. 더러운 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도, 창가에 정신없이 번쩍거리는 알전구에도. 이윽고 무지갯빛이 방울방울 맺히더니 뭉클하게 번져 나갔다. 훌쩍 눈가를 훔쳤다. 엄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을 지내며 많은 일터를 전전했다. 예상보다 잦은 무례를 맞닥뜨려야 했지만, 그때마다 내 어깰 감싸주던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 아이는 제 딸입니다.” 그러면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고 힘주었던 입꼬리도 느슨해졌다. 나를 올곧게 지켜주던 힘. 나는 엄마의 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겼다. 누군가 귀하게 아끼고 사랑한 유일한 존재라는 실감이 나를 꿋꿋하게 지지해 주었다.
“이 사람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 숙인 얼굴들을 상상한다. 먹고살려고 힘껏 애쓰는 생의 현장마다 누군가의 사랑이자 자랑인 사람이 있다. 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서도 기어코 무지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갈 이들을 마음 다해 존중하고 싶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美 대선 “아시아계 유권자 잡아라”… 한국어로 우편물-신문광고
- 尹, ‘세대간 형평’ 연금개혁안 준비…“연금 고갈 우려 해소”
- 그들만의 광복절… 與 “친일몰이 부적절” 野 “제2의 내선일체”
- 與 “막말 전현희, 책임 묻고 사과하라”…민주 “송석준 맞제명”
- 국토부, 기내식 컵라면 중단 권고…대한항공 “비즈니스는 계속”
- “北, 10월에 무력도발 가능성…트럼프에 보내는 메시지 일듯 ”
- 전기차 배터리 90%만 충전하면 불 날 위험 줄어들까
- ‘7년 내내 막내’ 안세영, 선배 라켓줄 갈아주고 방청소 도맡았다
- 고려인, 피란민으로 살아간다[동행]
- [김순덕 칼럼]끝나지 않는 역사전쟁… 내년 광복절이 더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