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거의 아무도 모르는 국제 詩축제

2024. 8. 15.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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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서 주목받는 한국 시
세계 각국 우리 문화에 깊은 관심
시인들의 문화예술 외교는 큰 힘
저력 키우는 문화예산 감축 말길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시인을 만났다. 예술산문집 ‘세계-사이’ 최종원고를 인쇄소에 넘기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기획과 편집, 제작, 마케팅까지 도맡고 있는 시인은 기진맥진할 법도 한데 박력 있다. 하지만 올핸 문학나눔사업도 없어지고 정부의 출판 관련 예산이 삭감되어 어려움 크다. “언니! 듀엣 낭독회에 올 수 있죠?” “못 가서 미안.” 나는 내일모레 중유럽에서 열리는 국제시축제에 가야 한다고 말하며 화제를 바꿨다.

‘국제시축제’에 간다고 하면 지인들 반응은 즉각 이런 식이다. 또 가? 아아, 나도 가고 싶다. 쳇! 국제적인 시인 나셨군. 어떡하면 초대받을 수 있어? 나갈 돈은 있니? 근데 가면 뭐해? 결국 “국제시축제가 뭐야?”라는 질문으로 모인다.

김이듬 시인
나는 위대하거나 굉장한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떠난다는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다. 하지만 국제시축제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에 진솔한 답변을 남기기로 한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대뜸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겠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시축제는 1969년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각국 시인들이 모여 시를 나누고 교류하는 축제가 현재 거의 모든 국가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는 서울국제작가축제가 있다. 올해로 13회, 9월 초 국내외 작가 24인이 모여 작가와의 만남, 다른 예술 장르와의 융복합 행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와 만난다.

나는 10여년 전 스웨덴의 문학잡지에 시 몇 편 발표한 걸 계기로 현지 시축제에 초청받았다. 혼자 한밤에 스톡홀름에 도착해 크리스마스 전후 며칠 축제를 치르며 라디오 인터뷰까지 했다. 그날 버벅거리며 주눅 든 걸 떠올리면 지금도 창피하다. 이후 프랑스, 미국, 중국, 덴마크, 말레이시아 등 국제시축제에 참석했다. 재작년엔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3개국 국제시축제에 다녀왔다. 베를린에서는 축제가 끝날 무렵 코로나19에 걸렸다. 행사 수고료로 받은 약 1000유로로 베를린 외곽을 전전 신음하며 이렇게 죽으면 단순 객사일까, 작가로서의 산재일까 중얼거렸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초청장을 받고 선뜻 참석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것은 축제가 가벼운 여행이나 만만한 잔치가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국제시축제는 통상 주최국의 예산으로 보통 3∼9일 진행된다. 참석 절차는 공식초청장에서 시작하는데, 이건 축제 개막일 6개월∼1년 전쯤 이메일로 당도한다. 각국 국제시축제 조직위원회 총괄 프로듀서, 디렉터, 코디네이터 등이 국제적인 인프라를 활용하여 초청할 시인들을 백방으로 탐색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국제적인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 그들의 레이더망에 쉽게 포착되는 것 같다.

다음은 계약서에 서명할 차례다. 거기엔 낭독회, 콘퍼런스, 시민과의 대화 등 최소 3∼5개의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 일정표에 명시된 날짜와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는 것, 영어로 쓴 바이오그래피와 자작시를 10편 정도 보내라는 것, 왕복 항공료와 숙박, 식사를 제공하되 축제 기간에만 한정된다는 것, 개별 시인에게 얼마의 수고료를 지불한다는 등 섬세하고 철저하게 권리와 의무 사항이 적혀 있다.

올해 슬로베니아 국제시축제는 놀랄 만한 사실을 부각하고 있다. 한국의 시와 문화에 초점을 맞춘 축제라는 것이다. 벌써 그곳에선 ‘헤어질 결심’과 ‘버닝’ 등 한국영화를 상영하며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고 한다.

나는 프투이 광장에서 열리는 개막식에서 한국어로 시를 낭독하고 한국·슬로베니아 번역 워크숍 등에 참석하는 건 물론이고, 한국 전통요리를 슬로베니아 주민들과 맛보며 한국의 맛과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국의 맛: 요리리듬과 문화리듬’ 행사도 맡는다.

이제 곧 나는 9일간의 축제 주빈 자격으로 출국한다. 국내의 관심이나 응원은 없지만, 슬로베니아 국민과 한국인 교민, 유학생들이 반겨주겠지. 예상보다 많은 시인이 소리소문없이 통역자나 환송객 없이 해외의 다양한 문학 행사에 다녀온다. 시인들의 문화예술 외교가 하찮고 미약해 보이겠지만 지극하고 강력하다. 한국 정부는 문학, 출판, 번역, 연극 등 예술 관련 예산을 제발 줄이지 말길 바란다.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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