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의료 도입으로 '의료 취약지' 문제 해결할 수 있을까?
올해 2월 말, 전공의 집단사직 사태 이후 비대면진료의 허용 범위가 확대되었다. 초진 환자와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도 비대면진료가 가능해진 것이다. 4월부터는 '의료취약지'의 의료공백을 해소하겠다는 명분 하에서, 지역 보건소, 보건지소에서의 비대면진료도 한시적으로 허용됐다.
그런데 과연 비대면진료는 '의료취약지' 주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줄이는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혹은 비대면진료가 의료 접근성을 높인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늘은 최근 국제 학술지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에 실린 논문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는 원격 및 디지털 의료서비스의 확대가 어떻게 기존의 건강 불평등을 악화시켰는지 살펴보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이유를 사회학자 마가렛 아처(Margaret Archer)의 '성찰성(reflexivity)' 이론을 기반으로 설명하고 있다(☞논문 바로가기: 디지털 시대의 성찰적 의무: 아처의 파편화된 성찰성 개념을 사용하여 영국 일차 진료에서의 불평등 심화를 이론화하기).
아처에 따르면 성찰성은 개인이 내적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상황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성찰성은 구조, 혹은 문화가 사회적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매개한다. 아처는 네 가지 성찰성 유형을 제시했는데, 이 연구에서 사용된 '파편화된 성찰성(fractured reflexivity)'은 개인이 자신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평가하거나 그에 대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디지털 진료라는 새로운 기술이 건강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충분한 해법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환자들이 과거 부정적 경험과 구조적 불평등으로 인해 스스로 전략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파편화된 성찰성을 지닌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는 영국의 일차의료 현장에서 원격 및 디지털 의료 방식의 도입으로 인해 복잡한 건강 문제와 사회적 요구를 가진 사람들이 서비스를 이용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드러내고,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편화된 성찰성 개념을 이용하여 규명하고자 시도한다. 이를 위해 2개의 민족지학적 종단 데이터셋(자료집합)에서 복잡한 요구를 지닌 환자와 관련된 임상 및 행정 업무에 대한 데이터, 그리고 특정 유형의 진료 상담에 환자를 배정하는 직원의 결정에 대한 데이터를 선별하였다. 여기에 추가로 의사와 환자 인터뷰 데이터를 종합하여, 총 40개의 실제 사례를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연구진은 원격 및 디지털 의료 방식이 종종 복잡한 요구를 가진 환자들의 어려움을 악화시키고 좌절감을 느끼게 하며, 의료진과의 갈등을 초래하고, 심지어는 원격의료 서비스 이용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와 관련하여 네 가지 복합 사례를 제시하는데, 이는 익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인터뷰의 결과를 혼합하여 가상의 사례를 생성한 것이다.
첫 번째 사례는 천식 흡입기의 재처방이 필요한 한 노숙인 환자 사례다.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진료소 등록은 할 수 있었지만, 전화로 진료 예약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화 대기 시간은 길었고, 그는 그만한 전화 요금을 감당할 형편이 안됐다. 마침내 전화 연결이 됐을 때는 이미 예약 접수가 마감됐다는 말을 들었다. 접수원이 온라인 예약을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복잡한 시스템에 좌절감을 느낀 그는 충동적으로 전화를 끊었고, 결국 필요한 의약품 처방을 받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사례는 약물 중독을 치료하다가 중도 포기한 환자에 관한 것이다. 그는 다시 약물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메타돈 처방을 요청했지만, 의사와 약물 담당자가 이메일과 같이 즉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 탓에 약물 처방이 지연되고 말았다. 게다가 폭력적인 파트너(연인 또는 배우자)가 자신의 전화기를 부수어서 의사와도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약국에서 오후 내내 기다렸지만 처방전은 도착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다시 약물에 빠져들었다.
세 번째 사례는 우울증, 불안,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심방세동 등 복잡한 건강 문제를 가진 환자 사례다. 그는 어깨 통증으로 침술 치료를 처방 받고자 온라인 진료를 신청했다. 하지만 전화 상담 과정에서 의사는 그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않은 채 약물 감량 계획만 제시하였다. 비록 의사로부터 침술 치료를 처방 받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에 부주의한 의사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고 실망하며 진료소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마지막은 모호한 증상과 낮은 건강 문해력을 지닌 환자에 관한 사례다. 디지털 기기에 능숙하지 않은 그는 온라인 진료를 신청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또 접수원과 연결된 후에도 자신의 증상을 정확히 설명하는 데 애를 먹었다. 통증 발병 부위나, 기간을 묻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하는 것이 어려웠고, 의사의 질문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맨 처음 진료를 신청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증상이나, 계기가 된 사건은 언급조차 하지 못한 상태로 진료가 끝났다.
이상의 사례들은 원격 및 디지털 의료 서비스가 파편화된 성찰성을 가진 환자들에게 오히려 의료 접근성을 낮추고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파편화된 성찰성을 가진 환자들이 직면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기를 제공하거나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건강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맥락에 적용해보자면, 이는 '의료 취약지'의 의료 공백과 그로 인한 건강 불평등 문제의 대안이 단순히 수도권 병원 이용을 편리하게 만들거나 원격의료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연구 결과로 볼 수 있다.
비단 디지털 진료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최근 다시 코로나19가 재유행하고 있는데, 지난 코로나 팬데믹 시기, 최첨단 과학기술이 동원돼 신속히 백신이 개발되었지만 이것만으로 감염병의 위험에서 손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건강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인 기술적 접근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 문제의 기저에 존재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다.
의료사회학자 그레이엄 스캠블러(G. Scambler)는 이 연구에서 소개한 사례에 해당하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취약한 파편화된 성찰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찾아야만 그들을 볼 수 있다."
근본 원인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찾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오늘 소개한 연구 외에도, 신기술 개발과 도입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불충분하다는 연구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격 및 디지털 의료만으로 건강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은 어쩌면 게으르고 무책임한 접근일 수 있다.
*서지 정보
Rybczynska‐Bunt, S., et al. (2024). The reflexive imperative in the digital age: Using Archer's 'fractured reflexivity' to theorise widening inequities in UK general practice. Sociology of Health & Illness.
[권시정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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