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수항의 하멜 [삶과 문화]

2024. 8. 1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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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눅진한 바다 냄새가 밀려왔다.

기차역이 있는 항구가 제주로 가는 커다란 여객선이 서는 신항이라면, 조선시대부터 고깃배들이 머물던 옛날 항구 '종포(鍾浦)'는 바다로 툭 튀어나온 언덕 너머에 있다.

1653년의 오늘이 바로, 바다에서 표류하던 하멜 일행이 조선 땅 제주에 처음으로 도착한 날.

이 보석 같은 바다도 하멜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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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 구항. ⓒ게티이미지뱅크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눅진한 바다 냄새가 밀려왔다. 달리고 달리다 기차마저 멈춘 남쪽의 땅끝, 기차역만 나서면 항구가 시작되는 여수다. 한쪽에서 들어와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는 역들과는 달리, 바다가 막아 선로가 끊어지고 더 갈 곳이 없는 종착역의 정취는 사뭇 다르다. 시동마저 끄고 선 기차들처럼 왠지 고단한 기분이랄까, 길을 잃은 밀항자처럼 스산하고 비장한 마음이 여행자에게도 스며든다.

기차역이 있는 항구가 제주로 가는 커다란 여객선이 서는 신항이라면, 조선시대부터 고깃배들이 머물던 옛날 항구 '종포(鍾浦)'는 바다로 툭 튀어나온 언덕 너머에 있다. 여수 토박이들은 '쫑포'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오래된 포구인데, 어선에서 내린 해산물을 쟁이던 창고부터 한때는 온갖 밀수품들이 몰래 쌓이던 낡은 건물들이 늘어섰다.

여수사람이라면 이 '쫑포'에 얽힌 추억이 많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몰래 숨어 마셔본 막걸리의 기억부터 고깃배가 들어오면 생선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허겁지겁 먹던 국수 한 그릇까지. 그 아이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서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나온다. 야자수까지 드리워진 해양공원으로 멋들어지게 변신은 했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쫑포'에는 고깃배들이 드나들고 해 질 녘 일과를 마친 뱃머리에서는 아저씨들이 소주 한 잔을 옆에 놓고 낚싯대를 드리운다.

종포의 끝자락까지 걸어가면 초등학교 때 배운, 그러나 제목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하멜 표류기'를 만난다. 방파제 끝에 서있는 빨간 등대가 바로 '하멜 등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원이었던 하멜이 마지막으로 밟고 떠난 조선의 땅이 이곳이라는 인연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동방견문록처럼 꿈과 모험이 가득한 기행문인 줄 알았다면 그건 큰 오해다. 하멜 표류기는 13년간 조선에 강제로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눈물의 고난기다.

1653년 일본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난파한 하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조선의 군대에 강제 배치된다. 청나라 사신 행차에 본국으로 보내달라며 소동을 일으켰다가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어 힘든 노역에 시달렸고, 기근이 심해지자 애물단지가 되어 전라좌수영인 여수를 비롯해 이곳저곳에 노예처럼 분산 수용된다. 그러니 조선에 억류된 기간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구구절절 쓴 업무보고서였던 셈이다.

1653년의 오늘이 바로, 바다에서 표류하던 하멜 일행이 조선 땅 제주에 처음으로 도착한 날. 오랜 탈출 계획 끝에 종포 해안에서 밤을 틈타 출항하기까지 13년 동안 오도 가도 못 하고 발이 묶인 신세였으니, 하멜 표류기를 통해 알려진 우리나라의 첫 이미지가 그리 좋지는 않았겠구나 싶다. 자식 교육에 집착한다든가 혈연 지연 같은 연줄이 중요하다든가 하는, 당대 조선에 대한 하멜의 묘사가 지금도 별반 다르지는 않고 말이다.

한창 여름을 지나는 여수의 바다는, 햇볕이 나면 에메랄드빛 청록색으로 반짝였다가, 구름이 나서면 사파이어처럼 짙푸른 색으로 깊어졌다. 이 보석 같은 바다도 하멜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겠지. 긴 세월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봤을 바다, 고향으로 돌아갈 탈출 경로만 수없이 그려졌을 바다. 하멜 등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보니, 마음의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상이 이런 건가 싶어졌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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