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1901년부터 2021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120년의 근현대사를 횡단하듯 조감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역사는 거대하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장소는 사람들의 소소한 발밑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혹독함을 감당해내야 하는 건 개미 같은 작은 개인들. 그간 헐레벌떡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면 이제 처마 밑의 대문과 문패와 고샅길의 한해살이풀들과도 눈 맞추는 심정으로 공부하면서 책을 만드는 중이다.
온기 없는 문자들, 무정한 사진들에 지난날이 실려 있다 해도, 특히 해방 전후 숨 가쁘게 전개된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은, 독립의 기쁨과는 별개로 충분히 분하고 고통스럽다. 마음속 치밀어오르는 게 없을 수 없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나라는 결딴나도 산하는 그대로, 두보). 그 어수선한 시절에도 봄은 의연히 오고 나라의 터전부터 다시 수선하였다. 가령 전라남도에 딸린 섬이었던 제주도(濟州島)를 제주도(濟州道)로 승격시켜 먼바다에 심장처럼 떼어놓았다.
해방이 발밑의 족쇄가 풀린 것이라면, 광복은 공중의 햇빛을 다시 찾은 것이다. 해방이 대지로부터 올라왔다면 광복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다. 이날 이후 대한민국은 공기가 달라지고, 한반도의 파도가 변했다. 나라가 비로소 나라가 된 것이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광복절이 가까워지면 잊지 않고 흥얼거리는 가사다. 위당 정인보(1893~1950)의 문장이다. 며칠 전 양명학의 대가이기도 한 선생의 <양명학연론>의 역자로부터 들은 바는 내 마음에 신선한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하루하루 산다는 게 참 엄숙한 사건이고, 지금 눈앞을 본다는 것도 어마어마한 사실을 목격하는 행위. 하늘은 아무 말씀이 없다지만 그 말없음을 통해서 늘 무슨 말을 함. 천둥과 벼락은 너무 답답해서 가끔 치는 호통. 한편, 저기에 있는 꽃을 꽃으로 드러나게 하는 건 꽃 앞의 ‘나’라는 인물. 아무 영문 모른 채 초점도 못 맞추는 이 띨띨한 자를 얼마나 안타깝게 여길까, 생각하자니 문득 이 나날의 현장에서 엄습하는 세계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
‘시절이 하수상하다’는 말은 학창 시절 어느 시조에서 배워 가끔 장난삼아 써먹던 말이었다. 오늘날, 그 말을 다시 중얼거릴 줄은 몰랐다. 흙 다시 만져보아야겠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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