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36) 효창공원 삼의사 묘

기자 2024. 8. 15.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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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결되지 않은 친일파…아직 실현 안 된 ‘이 땅의 정의’
효창공원 삼의사 묘 1971년(위 사진)과 2024년 |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탄창에 총알 8발을 한 발 한 발 장전할 때마다 떠오른다. 어머니의 얼굴, 눈물짓는 아내, 어린 자식의 미소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모습…. 총알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4발, 경호원들에게 3발이 명중됐다. 총을 발사한 자는 “대한독립 만세!”를 러시아어로 외치고 체포됐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일본 수사관에게 “나는 목적한 사람을 쏘았으니 그 후엔 발사할 필요가 없어서 멈췄다”고 대답했다. 그는 안중근이다.

독립운동의 여러 방식 중에서 일제의 상징적 인물에게 폭탄을 던지거나 총을 쏜 의사(義士)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 등이 있다. 이들은 거사 후 고문, 사형이라는 끔찍한 고난에 기꺼이 동의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는 해방이 되고나서야 해외에서 봉환되어 1946년 효창공원에 묻혔다. 3인이 안장된 묘소가 ‘삼의사(三義士) 묘’다. 그런데 삼의사 묘소엔 묘가 3개가 아닌 4개 있다. 2024년 사진의 맨 왼쪽 묘가 안중근의 가묘다. 그의 유해를 찾지 못해 비워놓은 가짜 묘다. 그래서 사의사(四義士) 묘가 아니라 삼의사 묘라 불렀다. 안중근의 시신은 사라졌다. 일제는 사형 집행 후 죽은 안중근이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 유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암매장해 버렸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살해 증거인 권총이 분실됐다고 발표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심장을 관통한 권총도 사라졌다.

1971년 흑백사진 속의 삼의사 묘소는 황폐화돼 잔디가 심하게 훼손되어 맨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본명 다카기 마사오였던 일본군 중위 출신 박정희는 삼의사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에 반공투사 위령탑을 노골적으로 세웠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것을 꺼린, 박정희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후손들이 안중근의 유해와 권총을 찾고 있지만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것은 ‘이 땅의 정의’다. 독립군을 토벌했던 일본군 출신 친일파 76명이 현충원에 누워 있다. 친일파 무덤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삼의사 묘는 용산구청이 동네공원(근린공원)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식민지배가 정당하다’는 자가 독립기념관 관장 자리에 앉았다. 해방 후 척결되지 않은 친일파들이 반공 친미주의자로 변신, 대대손손 권력을 누리면서 ‘이 땅의 정의’는 사라졌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만큼 숨이 턱 막히는 열대야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 쾌거에 조선인들은 숨통이 트였다. 그의 총엔 아직 발사 안 된 총알 한 발이 남아있다.

*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 협동조합 사이트(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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