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리더에게 휴식은 곧 준비라는데…
아파도 직무 소홀히 하지 않은 순신
도결산이 보낸 사슴 군관에게 양보
겨울 내내 강력한 수군 만든 이순신
순신의 열정에 백성들의 성원 잇따라
이순신에게 '봄'은 곧 전쟁을 의미한다. 당연히 그에게 '겨울'은 휴식의 시간이 아니다. 봄에 벌어질 전쟁에 대비해야 할 '준비의 시간'이다. 지도자에게 준비는 이런 거다. 정부든 기업이든 지도자가 준비하지 않으면 불가측한 변수에 대응할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지도자는 어떨까. 유례없는 복합적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출구'를 찾아놓았을까.
조정에서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이순신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1597년 10월 24일 초저녁, 선전관 하응서가 임금의 분부를 갖고 왔다. 칠천량 전투에서 도주한 우후 이몽구를 처형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와 함께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수군 5000명과 병선 70여척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도착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순신은 이날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탈이 났다. 그런데 새벽 3시에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해가 뜨자마자 만나봤는데, 이번에는 선전관 권길과 금부도사 홍지수였다. 무안 현감 남언상, 목포 만호 방수경, 다경포 만호 윤승남 등 지방관을 잡으러 왔다고 했다.
다음날에도 이순신은 몸이 매우 아팠다. 그런데 이날 또 선전관 박희무가 선조의 명령을 전달하러 왔다. "진린의 남하에 대비해 주둔할 만한 근거지를 정해 올리라"였다. 이순신은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28일 아침,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의 향후 주둔지로는 고금도(전라도 완도군 고금면)가 적합하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려 보냈다. 그리고 아들의 혼령과 함께 지내던 강막지의 집에서 나와 지휘선에 올라탔다. 그동안 모색했던 조선 함대의 겨울나기 장소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수척해진 영웅의 모습에 주위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저녁에 염전의 서원 도결산이 보신을 하라며 큰 사슴을 잡아다 바쳤다. 이순신은 군관들에게 나눠 먹게 했다. 정유년 들어 모친과 아들을 잃은 죄로 어육魚肉을 피하고 소식하며 지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29일 새벽 2시. 안편도에 있던 조선 수군 함대에 출발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겨울 날씨를 알리는 비·우박이 쏟아지는 가운데 함대는 목포 앞바다에 있는 고하도의 끝부분에 위치한 보화도로 이동해서 정박했다. 서풍을 막아줄 산이 있고 함대를 감춰놓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곳에 진을 치고 집을 지어 겨울을 보내면서 군세를 정비하도록 한다." 이순신에게 봄은 곧 전쟁이었다. 이 때문에 겨울 내내 추위를 무릅쓰며 예전과 같은 강력한 수군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 쳤다.
군대의 사격훈련장에서는 절대적인 준수사항이 있다. 지휘관이 "준비된 사수부터 사격!"이란 명령이 떨어져야만 비로소 과녁을 향해 총알을 발사할 수 있다. 적을 물리치기 위한 기본이 바로 준비다. 준비되지 않은 자가 화기를 다루면, 원균의 경우처럼 다양한 형태의 쓰디쓴 상황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이순신은 가장 먼저 수천명의 일꾼을 독려하며 집과 군량 창고를 짓는 일에 착수했다. 그런데 11월 2일에 전라우수사의 전선이 바람에 표류되면서 그만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는 일이 발생했다.
해당 전선의 군관 당언량에게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를 쳤다. 군율만은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다. 이날은 선창에서 다리를 놓는 일을 직접 감독하기도 했는데, 이 공사는 보화도와 고하도를 잇는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열정을 바치는 동안 지역 관리와 백성들의 자발적인 성원도 잇따랐다. 11월 5일 영암군수 이종성은 밥을 30말이나 지어서 일꾼들에게 먹었다. 또 군량 200섬과 벼 700섬을 제공했다. 이어 7일에는 전 흥산 현감 윤영현과 생원 최집이 방문해 벼 40석과 쌀 8석을 전달했다. 이순신은 이날 자정에 죽은 아들의 꿈을 꾸고 구슬프게 울었다.
이런 가운데 함선 건조와 개·보수, 군기 정비 등에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주변에 숨어있는 왜적 토벌과 탐망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 덕에 보화도에 머물렀던 3개월 반 동안 판옥선 40여척을 마련했다. 해남의 의병과 통제사 본영의 군사들은 숨어있는 왜적을 찾아 머리를 베어 오기도 했다. 마침내는 "장흥에 있던 적들이 달아났습니다" "완도를 정탐했으나 적들의 배는 1척도 없습니다"란 보고가 이어졌다.
11월 16일, 진중의 여러 장수가 참석한 가운데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지 2개월 만에 도착한 포상자 명단이 발표됐다. 거제 현령 안위는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로 승급하고, 나머지 장졸들도 차례로 포상을 받았다. 이때 이순신은 상으로 은 20냥을 받았다. 명나라 측은 이순신을 더 우대했다.
명나라 경리 양호는 붉은 비단 깃발과 함께 "함선에서 쾌흥을 행하고 싶으나 멀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란 양해의 서신도 보냈다. 다음날에는 양호의 차관이 찾아와 명나라 만력제가 보낸 '초유문'과 '면사첩'을 전달했다.
이순신이 통제영을 보화도로 옮긴 지 1개월이 넘어가면서 어느덧 1597년 정유년도 막바지에 들어갔다. 12월 첫날 아침, 여해汝諧 이순신(충무공)에게 입부立夫 이순신李純信(무의공)이 찾아왔다. 이순신 휘하에서 중위장과 부관을 지냈던 그는 배설 후임으로 경상우수사로 임명돼 인사차 방문한 것이다. 입부는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 제일 먼저 술을 들고 찾아와 밤새 함께 얘기를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오전부터 아파서 저녁에야 입부를 만나 수군재건 대책을 논의했다. 입부 이순신이 불쑥 전에도 얘기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영감께서 그간 몸이 많이 상하셨소. 이제라도 개소(다시 육식을 시작하는 것)를 하시지요." 이순신은 이 말이 나올 때면 딴청을 피운다. "아아 참! 그러니까, 며칠 후엔 정응남에게 종 점세를 붙여 진도로 보낼까 하오. 함선 건조에 살펴볼 게 많소."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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