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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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르탱 샤르코는 19세기 프랑스의 의학자.
오늘날 샤르코의 이름은 '프로이트의 스승'으로 자주 언급된다.
1885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젊은 프로이트는 샤르코를 존경한 나머지, 큰아들 이름을 장마르탱 프로이트로 지을 정도였다.
"샤르코는 사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술가적 기질을 지녔다. 시각적, 즉 보는 인간이었다." 프로이트는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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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 장마르탱 샤르코 (1825~1893)
장마르탱 샤르코는 19세기 프랑스의 의학자. ‘신경정신의학의 나폴레옹’으로 불릴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인간 비참이 모인 곳’으로 불리던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수천명의 신경정신질환자를 연구했다. 논문과 책을 많이 썼고, 교육자로도 성공했다. 유럽 곳곳에서 제자를 받았다.
오늘날 샤르코의 이름은 ‘프로이트의 스승’으로 자주 언급된다. 1885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젊은 프로이트는 샤르코를 존경한 나머지, 큰아들 이름을 장마르탱 프로이트로 지을 정도였다. 샤르코는 환자를 앞에 두고 오랫동안 말없이 들여다보곤 했다고 한다. “샤르코는 사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술가적 기질을 지녔다. 시각적, 즉 보는 인간이었다.” 프로이트는 회고했다.
샤르코는 많은 시간을 들여 히스테리를 연구했다. 환자에게 최면을 걸어 상태를 관찰했다. 사진이라는 ‘신기술’도 도입했다. 병원에 사진부를 두고, 히스테리 환자들의 순간포착 사진과 연속동작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하여 샤르코의 연구진은 다양한 히스테리 증상을 유형에 따라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아니, 성공했다고 믿었다. 샤르코는 자신의 이론에 지나치게 심취했던 것 같다. 수많은 사진 가운데 자기 이론에 맞는 사진을 골라냈다. 이론에 맞추기 위해 연속동작 사진의 순서를 바꿔 편집하기도 했다. 환자의 자세를 ‘연출’하여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진을 연구한 박상우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샤르코의 환자는 “많은 경우 사진가의 지시”를 따랐고, 때로는 이론을 이미 접한 환자가 “알아서 스스로 연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샤르코는 사진을 보고 이론을 세운 것이 아니라, 이론에 맞춰 사진을 찍은 셈. 샤르코는 신경의 물리적 손상 때문에 히스테리와 같은 질환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프로이트는 이 주장을 비판하며, 인간 무의식에 대한 독자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샤르코의 여러 업적이 현대 의학에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의 히스테리 이론은, 샤르코가 1893년 8월16일에 세상을 떠난 뒤 대부분 잊혔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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