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 윤석열의 ‘2024’ [아침햇발]

이봉현 기자 2024. 8. 1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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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984’ 속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는 ‘자유는 굴종’ 같은 반어적 표현이 난무해 무엇이 진실이고, 사물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완벽한 당의 통제가 구현된다. 사진은 국립극단이 2017년 무대에 올린 연극 ‘1984’의 장면. 국립극단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암울한 미래를 그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주인공 윈스턴이 사는 오세아니아에는 이름과 하는 일이 완전히 다른 정부 부서들이 있다. 진리부는 뉴스, 역사 등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게 임무다. 애정부는 사상범을 고문하고 가혹하게 법 집행을 하는 곳이다. 평화부는 전쟁을 관장하고, 풍요부는 주로 배급량을 줄인다는 발표를 하는 곳이다. 거리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당의 슬로건이 펄럭인다.

이런 반어적 표현은 당이 강조하는 ‘이중사고’의 덕목이다. 모순인 줄 알면서 두가지를 동시에 진짜라 믿는 걸 말한다. 이를 위해 과거는 끊임없이 지워지고, 지워진 사실마저 잊혀 거짓이 진실이 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와 미래를 지배한다’는 당의 슬로건은 이중사고를 통해 실현된다. 오웰은 여기서 기억을 조작하고 정체성을 흩트리는 게 전체주의 폭압의 기본 통치술임을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에서 점점 노골화하는 흐름이 있다. 바로 해당 기관의 설립 취지나 존재 이유와 정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인물을 책임자로 앉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직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고 무력화한다.

그는 최근 인권 보호의 최전선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에 인권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을 지명했다. 안창호 후보자는 성소수자를 향해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해왔고, 차별금지법에 대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는 ‘긴 행진’의 수단이 될 우려도 있다”는 말도 했다. 헌법재판관 시절 낙태죄, 양심적 병역거부, 사형제 등 주요 인권 쟁점에 대해 국제인권기구나 국가인권위가 견지한 입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의견을 내왔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소셜미디어에 그동안 대통령들이 “전문성이 부족한 인물을 위원장에 지명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정반대 입장을 가진 인물을 지명한 적은 없었다”고 썼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김광동 위원장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보상하는 것을 두고 “이런 부정의는 대한민국에서 처음 봤다”고 했다. 그는 또 유족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도 했다. “전시엔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 “노근리 사건은 불법 희생이 아니다. 부수적 피해다”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했다. 국가에 의한 인권 유린과 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 명예회복을 책임지는 기관의 수장이 설립 취지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교육위원회 등 역사·교육 관련 기관에는 민족주의를 반일종족주의로 헐뜯고 일제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성향 인사가 단체장으로 대거 진입했다. 독립정신을 기려야 할 독립기념관도 백선엽, 안익태 같은 친일경력자를 두둔하는 인사가 관장 자리에 앉았다.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한 국민권익위원회에는 윤석열 대선 캠프 출신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포진했다. 고용노동부 장관에 유튜브에서 노조 혐오를 부추겨온 김문수씨를 지명한 것이나, 방송의 독립성을 지켜야 할 방송통신위원회에 방송 장악 의지를 숨기지 않는 이진숙씨를 위원장으로 앉힌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보니 이 정부에서 인권은 반인권, 진실·화해는 왜곡과 분란, 식민지배는 근대화, 노동은 반노동으로 의미가 물구나무섰다. 이런 가치를 고양할 임무를 띤 해당 기관들은 만신창이가 되고 직원들의 반발도 이어진다. 숨진 권익위 국장도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해야 하는 괴로움을 주변에 토로해왔다.

윤 대통령은 왜 이런 인사를 할까? 그가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를 만큼 무능하다거나, 덕망 있고 능력 있는 인물은 모두 정권 곁에 가기를 거절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국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한 만큼, 이념전쟁과 역사전쟁으로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이든 이대로 가면 나라는 닻줄 끊긴 배처럼 표류할 것이다. 공자는 정치의 첫출발이 명실상부, 즉 ‘정명’(正名)이라 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言)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흐려지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이 여러 정책에 무능해도 대한민국은 3년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말을 흩트려놓으면 안 그래도 심각한 분열과 갈등은 불치병이 될 것이다.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 이리 폭주를 하는가?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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