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셀 희망버스’라는 절망버스를 기다리며 [시론]

한겨레 2024. 8. 1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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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7월27일 오후 폭우를 맞으며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중구 서울역으로 행진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손호철 |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백기완재단 자문위원

‘신생국 중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에 성공한 나라.’ 보수세력이 우리 현대사를 자랑하며 자주 사용하는 구호다. 맞다. 카타르, 싱가포르 등은 ‘경제발전’에 성공해 1인당 국민소득이 최상위권에 속하지만 민주주의는 4, 5등급에 머물고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에 성공했지만 경제는 실패한 신생국도 많다. 이 점에서, 아직 부족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는 주장은 맞다. 아니다. 대한민국만은 아니고 대만까지 두 나라다.

하지만 보수세력처럼 이러한 성과에 취해 자만에 빠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이들 성과 뒤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어둠들’을 주목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 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행복지수, 최하위 수준의 사회복지지출 등 그 목록은 길다. 이들에 눈을 감고 성과만 자랑하는 것은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암세포는 외면하며 외형적 건강만 자랑하는 얼간이와 다름없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과 산재사망률이다. 대한민국은 부끄럽게도 먹고살기 위해 출근했다가 산재 사고를 겪고 차가운 주검으로 집에 돌아올 확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비극적 산재 희생자인 태안발전소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 열사의 어머니 김미숙 여사와 정의당의 단식투쟁 등으로 어렵게 중대재해처벌법이 생겼지만 산재는 끊이지 않고 있다.

아리셀. 경기도 화성에 있는 이 리튬전지 제조업체는 2024년 여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6월 말 아리셀에서 폭발 화재로 2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비극이 생겨났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산재 예방 조처가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3명의 사망자 중 18명이 불법파견 노동자, 특히 중국과 라오스 등에서 ‘코리안드림’을 갖고 찾아온 이주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원청인 아리셀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불법적으로 파견노동자들을 고용했으며 제대로 된 안전교육이나 안전시설도 마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 사건이 정규직이 꺼리는 ‘위험하고 더러운 작업’을 비정규직에게 전가하는 ‘위험의 외주화’를 상징한다면,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는 ‘위험의 외주화’에 더해져 우리 경제가 위험한 작업은 이주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위험의 이주화’에 기초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위험의 외주화·이주화’다. 부끄럽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이후 유가족과 노동 및 사회단체들은 피해자가족위원회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책 수립, 차별 없는 피해자 권리보장, 이주노동자 실질 안전 대책 등을 요구하며 화성시청 안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매일 추모제를 여는 등 투쟁하고 있다. 한심한 것은 이러한 비극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화성시와 아리셀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피해자 가족의 회유 등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의 생명과 권리를 우려하는 사회 원로들과 시민들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산재 사망과 이주노동자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55일째인 8월17일 전국에서 ‘죽음과 차별을 멈추기 위한 아리셀 희망버스’ 55대로 출발해 아리셀 참사 현장에 집결한다. 2011년 대량 정리해고에 저항해 복직을 요구하며 부산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 중이던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리기 위해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문정현 신부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해 ‘21세기 한국 사회운동의 새로운 투쟁 방식’으로 자리 잡은 희망버스는 이번 아리셀 희망버스로 26번째가 된다.

아리셀 희망버스의 일환으로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 추진하는 ‘제1차 백기완 연대버스’ 탑승을 기다리며 나는 기원한다. 일터로 나간 아빠와 엄마, 오빠와 언니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오지 않는 대한민국, 비인도적인 파견법이 없는 대한민국, 이주노동자의 차별이 없는 대한민국, 위험의 외주화·이주화가 없는 대한민국, ‘희망버스라는 절망버스’가 필요 없는 대한민국을. 해방 80년의 성과를 자랑하기에 앞서, 죽음과 차별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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