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사고’라 부르던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를 애써 ‘교통사고’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 ‘사고’의 사전적 정의다. ‘사고였다’는 말에는 단지 실수이고 불운했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얼마 전 일어난 ‘아리셀 화재’는 어떨까? 지난 6월, 경기도 화성의 리튬전지 제조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23명이 사망했다. 이 중 18명이 이주노동자이고 17명이 여성이다. 3개월 전 실시한 소방 점검에 따르면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우려 지역으로 화재 장소가 지목되었다. 화재가 난 2층에는 비상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방치된’ 위험이었다.
비슷한 사건이 1991년 미국에서도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햄릿의 한 육가공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 25명이 죽었다. 피해자 대부분이 흑인 여성이었다. 안전 수칙 150건을 위반하고 비상구마저 잠겨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노동자들이 닭고기를 자주 훔쳐가 소유주가 문을 잠가뒀다는 루머가 돌았다. 피해자들이 부도덕해서 벌어진 일처럼 여론이 조성되었다. ‘인적 과실’을 탓하는 서사가 만들어지는 동안 시스템의 실패는 면죄부를 얻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안전 문제 전문가·활동가인 제시 싱어는 ‘사고는 없다’고 주장한다. 대형 참사뿐만 아니라 단신으로 처리되는 교통사고, 익사, 낙상도 마찬가지다. 2006년 자전거 교통사고로 친구를 잃은 그는 당시의 일을 계기로 ‘사고’라는 용어가 어떻게 그걸 일으키는 시스템에 면죄부를 주는지, 어떻게 권력자의 이윤을 보호하고 취약한 사람을 더 큰 피해로 내모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통사고부터 재난 참사에 이르기까지 지난 한 세기 동안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고의 역사를 추적한 그의 책 〈사고는 없다〉가 최근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3분마다 한 명이 사고로 죽는 미국의 사례에서 씨랜드 화재,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 한국의 ‘실패한 과거’들이 겹쳐 보인다. 통계에는 많은 이야기가 빠져 있고, 그 사실을 힘들게 배웠다는 제시 싱어를 서면으로 만났다. (사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평소 사고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그는 그 단어(accident)를 언급할 때마다 작은따옴표를 붙였다.
책을 읽고 나니 제목이 더 와닿는다. 왜 사고는 없다는 건가?
‘사고’라는 단어는 일어난 일이 우발적이었으며 예견하거나 예방할 수 없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데이터와 ‘사고’의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발적이지도, 예견 불가능하지도 않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흑인은 백인보다 주택 화재로 사망할 확률이 두 배 이상 높고, 선주민은 백인보다 차에 치여 사망할 확률이 두 배 이상 높으며, 상대적으로 가난한 웨스트버지니아주에 사는 사람들은 바로 몇 마일 거리의 버지니아주 사람들보다 ‘사고’로 사망할 확률이 두 배 이상 높다. 흑인, 선주민, 웨스트버지니아 주민이 다른 사람들보다 ‘사고’를 더 잘 내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사망을 비롯해 부상 가능성이 더 높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미국인들은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가 더 칠칠치 못해서일까? 물론 아니다. 그저 미국이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적은 비용을 지출하고 기업이 시민을 해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허용할 뿐이다.
수많은 사고의 역사를 추적했다. 특히 가해자 취재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한 과거의 신문 자료, 기술문서, 인터뷰 수백 건, 법원 기록 수천 페이지를 바탕으로 썼다. 가장 어려운 건 ‘사고’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생존자들과 나눈 대화였다. 참사가 발생하면 우리는 가해자들과 그들의 잘못에 집중하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취재 과정에서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점이 거듭 드러났다. 생존자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이 참혹함을 겪으며 예방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면 유일한 해답은 처벌과 응징이 된다. 하지만 피해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피해 예방의 수많은 경로를 찾을 수 있다.
메이지 길런의 부모가 떠오른다. 9개월 된 아기가 이웃집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 약을 먹고 사망한 사건이었다. 언젠가 바닥에 약병이 떨어졌는데 그때 약을 모두 줍지 못했던 것이다. 메이지의 부모는 현재 오피오이드 알약 낱개 블리스터(플라스틱 성형) 포장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누군가 불가피하게 실수를 저질렀을 때 피해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전부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서 온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사람은 그들이다.
한국에서도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사고’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이 겪은 대형 참사는 전 세계의 대형 ‘사고’에서 볼 수 있는 패턴을 따르고 있다. 우선 무너질 날만 기다리는 취약한 시스템이 있다. 위험한 상황이 쌓이다 마침내 ‘끓어넘치게’ 하는 실수가 발생한다. 그 후에는 개인의 책임과 처벌에 초점을 맞춘다. 동시에 시스템의 실패에 대한 조사를 거부하는 현상이 따라온다. 재난의 예측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피하기 위해 정보는 은폐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결과와 마주한 대중은 덮어씌울 대상을 찾아 눈을 돌린다. 타이태닉 침몰부터 스리마일섬 원자력발전소 붕괴, 그렌펠 타워 화재에 이르기까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어왔다.
그리고 비슷한 패턴에 따라, 그처럼 끔찍하지만 드문 ‘사고’는 불나방처럼 우리의 관심을 끄는 반면 매년 훨씬 더 많은 사망자를 내는 일상적 소규모 ‘사고’는 무시된다. 1910년에도 노동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털 이스트먼이 글을 썼을 정도로 이러한 경향은 흔하고 뿌리 깊다. 매일 광부 한 명이 사망하는 것과 탄광 폭발 사고를 대하는 대중의 반응이 어떻게 다른지 그는 이렇게 썼다. “재난은 그 규모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광부 한 명이 갱도 깊은 곳에 있는 ‘방’에서 갑자기 떨어진 1t 또는 2t의 점판암에 깔려 죽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논의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는 대중의 귀에 단조로운 반복음으로만 들릴 뿐이다.”
소규모 사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1인 ‘사고’가 더 중요한 이유는 전체 통계수치상 사망자와 부상자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해결하기도 더 간단하기 때문이다. 대형 선박이나 발전소에서 사고가 일어난 경우 기존의 여러 안전 조치가 실패한 것이므로 분석하기 어렵고 일이 복잡하다. 하지만 주택 화재나 자동차 사고 같은 일상적 비극의 경우 누군가 실수했을 때 차량 및 건물 규제, 도로 안전장치, 안전설비 등의 간단한 조치로도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작은 ‘사고’를 해결하면 큰 ‘사고’로부터도 보호할 수 있다.
운전자 과실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친구가 차에 치여 사망했고 그 경험에서 이 모든 게 시작되었다. 11년 뒤, 같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8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날 아침 전화를 받고 내 친구가 죽은 곳과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가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교통공학자들이, 내 친구를 사망하게 했던 조건을 변경해 간단하게, 순식간에 더 이상의 피해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도로 사이 강철로 된 방책이 설치되고 진출입로에 차단봉을 세웠다). 그들이 더는 인적 과실을 탓하지 않고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자, 다시는 대량 살인과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문제를 일종의 ‘마술적 사고’로 개별화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인적 과실을 탓하는 것은 예방 가능한 피해를 무시하게 만드는 환상이다. 조건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보다 누군가 실수했다고 판단하는 게 더 저렴하고, 더 쉽고, 더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실수와 잘못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예방 가능한 죽음을 허용하는지 조사하는 데 인생을 바쳐온 것도, 반복된 죽음 때문이라기보다 더 이상 ‘사고’라고 부르지 않을 때 문제가 너무나 쉽게 해결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무단횡단자(jaywalker)’라는 말도 ‘발명’되었다고 책에 썼다. 안전장치를 도입하는 데 드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던 자동차 제조사들이 퍼뜨린 말이라고?
무단횡단자, 즉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흠결이 문제라면 사회는 더 많은 규칙을 만들고 어떻게든 사람들이 규칙을 따르도록 강제하게 된다. 끝없는 두더지 잡기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동차나 도로의 설계, 즉 위험한 조건이 문제라면 우리가 할 일은 그 조건을 바꾸는 것이다. 스웨덴 및 유럽의 여러 국가처럼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조건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 곳에서는 보행자 사망률이 현저히 낮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술 취한 사람에게도 안전한 세상을 만든다면 모든 사람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수전 P. 베이커의 말을 인용했다.
정말 좋아하는 문구다. 이 인용문은 어떤 사람들에겐 불쾌감을 준다. 그 불쾌감의 핵심에는 술에 취해 돌아다니다가 다치는 사람은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음주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도 있지만, 만약 누군가 몸이 아파서 주의를 덜 기울이다 부상당한다면 어떨까? 그 일을 당할 만했던 걸까? 우는 아이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진 엄마는? 어린아이는? 이 모두는 때때로 주의력이나 조심성이 술에 취한 사람 정도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들이 실수한다고 해서 우리가 죽도록 비난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왜 술 취한 사람에게는 그러는 걸까? 무언가를 술 취한 사람에게도 안전하게 만든다면 감기에 걸린 사람, 주의를 빼앗긴 부모, 유아, 종종 완벽하지 않은 나나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유용한 관점이다.
모든 사고 유형에서 백인보다 흑인이 사망할 확률이 높으며 부유층과 백인일수록 사고를 당할 확률이 낮다는 걸 통계로 확인했다. 그런 현실 앞에 개인은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사고’ 문제의 희망적인 측면 하나는 사망과 부상이 인적 과실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행동을 고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사람들을 보호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취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해진다. 예를 들어 도로에서 과속 문제를 걱정할 때 과속 운전자의 인적 과실에만 집중한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모든 과속 운전자를 잡겠는가? 하지만 도로 시스템에 대해 걱정하고 과속으로 인한 피해 가능성을 줄일 방법을 찾는다면 해결책이 많다. 도로를 좁히고, 자동 과속 단속 카메라를 설치하며, 교통안전 차단봉을 설치하고, 자동차에 지능형 속도제어 기능을 의무화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비난에서 한발 멀어지면, 우리는 개인으로서 온갖 종류의 작고도 현실적인 방법을 지지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사고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계급·인종·낙인은 아주 강력하게 인적 과실과 책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자본주의는 거기에 더욱 힘을 실어줘 예방 가능한 피해를 그저 ‘사고’로 여기게 만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분노의 태도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서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예방할 수 있는 죽음을 허용하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 말이다. 책 말미에도 나오지만 그런 원동력을 행동주의로 발전시키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지금 이 대화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걸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어떤 일이든 ‘사고’라고 부르는 걸 받아들이지 말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의문을 제기하라. 인종·계급·낙인이 특정 사람들을 더 취약하게 만드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런 상황을 발견하면 지적하라. 사고는 없다. 그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무력감에 맞서는 치유제다.
※번역 도움: 박현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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