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시장 위기, SK가 흔들린다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서든 데스(돌연사)할 수도 있다.” 지난해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내부 임직원들에게 해온 말이다. 1998년 취임 당시 “(혁신하지 않으면) 천천히 사라진다”라며 ‘슬로 데스’를 언급했던 그가 최근 SK의 재무 상황을 보고 ‘서든 데스’를 언급한 것이다.
SK에 대한 시장 평가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창사 이래 역대급 위기’라는 수식어도 붙는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4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현황’에 따르면 SK는 전년 대비 당기순이익이 가장 많이 감소했으며(약 10조4000억원), 매출액은 삼성 다음으로 많이 줄었다(약 23조2000억원).
SK의 이 같은 위기는 ‘SK스러운’ 경영 방식과 급변한 외부 환경이 만난 결과다. SK는 금융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대표적 그룹이다. 금융시장에서 마련한 자금으로 설비투자와 인수·합병(M&A) 등을 거쳐 사업 확장을 하며 성장해온 것이 ‘SK 스타일’이다. 문제는 전 세계적인 고금리 기조로 차입금(빌린 돈) 부담이 가중된 데다, 수요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에너지 전환 사업에 대규모 설비투자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5월16일 한국신용평가에서 개최한 ‘2024 그룹 분석 웹세미나’에서 ‘SK그룹: 본격화되는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을 주제로 발표한 장수명 수석연구원은 2020년부터 2023년까지 SK의 현금 부족액이 50조원을 상회한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외부 차입에 따른 재무 부담 증가분은 약 36조원에 이른다. 주요 계열사들을 중심으로 17조원 이상의 자본성 자금이 조달됐는데, 이 중 8조원은 채무적 성격이 있었다.
재무안정성을 꾀하기 위해 SK는 차입금 감축 기조로 돌아섰다. 문제는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온이다.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글로벌 공장 신설, 배터리 제품군 확대 등 여전히 대규모 투자를 멈출 수 없는 상태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에 이어 후발 주자로 배터리 사업에 뛰어든 SK온에 대해, 기술력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단기간에 무리한 투자를 했다는 시장의 평가가 나온다.
‘잘되는 계열사’ 하이닉스뿐
일례로 2022년 12월 SK온은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와 배터리 합작법인을 통해 미국 켄터키주, 테네시주 등지에 배터리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금액만 무려 15조원이다. 하지만 포드, 폭스바겐 같은 주요 고객사의 사업이 위축됐다. 반면 SK온이 짊어져야 하는 고정비 부담은 줄어들지 않는다. SK온의 부채비율은 2022년 말 258.1%까지 상승했다가 올해 1분기 말 188.2% 수준을 기록했다. 부채비율이 줄었지만 경쟁사인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의 부채비율이 각각 84.5%, 72.2%라는 점을 감안하면 재무구조의 불안정성이 매우 높다. SK온은 7월부터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SK온의 부진으로 재무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지금, SK의 경영 키워드는 ‘리밸런싱(사업 재편)’이다. SK의 최고 의사 논의 기구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의 관계자는 〈시사IN〉과 한 통화에서 ‘투자’와 ‘성장’의 시기를 지나 ‘안정화’가 절실한 상황이 됐다고 설명했다. “재무관리, 안정적 펀더멘털 유지를 위한 현금 확보가 시급하다. 기업 전반에 하이닉스를 빼면 ‘잘되는 회사(계열사)’는 없고 ‘어려운 회사’와 ‘덜 어려운 회사’가 있을 뿐이라는 말이 돈다.”
이런 상황에서 최태원 회장은 자신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의장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 앉히며 그룹 2인자로 힘을 실어주었다. 지금까지 최태원 회장은 계열사들에 그룹 경영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사회를 강화하는 경영전략을 펼치고자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신임이 두터운 최창원 의장을 중심으로 중앙집권 형태의 경영을 이끌 것을 예고한 셈이다.
고 최종건 SK 창업주의 셋째 아들이기도 한 최창원 의장은 ‘재무통’으로 불린다. 최창원 의장은 SK 2세 오너 경영인들의 ‘따로 또 같이’ 전략에 따라 SK디스커버리를 독자 경영해왔다. 최태원 회장의 호출은 이제 ‘따로’가 아니라 ‘또 같이’에 힘을 줘야 할 때라는 신호다. 최창원 의장은 계열사마다 경쟁적으로 ‘친환경 투자’에 앞장섰지만 실적이 부진해 재무 부담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린·바이오 분야에서의 원칙 없는 ‘양적 사업 확장’이 부메랑이 됐다는 것이다.
최창원 의장은 늘어난 ‘딸린 식구’에 대한 문제의식도 드러냈다. 올해 SK의 계열사는 219개로 전년 대비 21개 늘었다(33개 늘고 12개 줄어듦). 대기업 집단 중 계열사가 가장 많다. 문어발식 확장으로 비판받았던 카카오 그룹은 전년 대비 계열사를 19개 줄여 현재 총 128개다. 삼성은 63개다. 최창원 의장은 계열사 숫자가 너무 많다며 살릴 사업과 없앨 사업을 가려내 관리 가능한 범위 내로 계열사 수를 줄이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본격적인 리밸런싱 행보는 이미 시작됐다. 지난 7월17일,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이 이사회에서 의결됐다. SK이노베이션이 합병 존속회사가 되어 SK E&S를 품는 형태다. 석유화학부터 LNG·재생에너지·수소 등을 핵심 사업으로 갖는 자산 100조원 규모의 종합 에너지 ‘공룡’이 탄생을 앞두고 있다. 이번 합병에 대한 시장의 평가도 우호적이다. 합병 이후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투기등급(BB+ Stable)으로 낮추었던 SK이노베이션의 신용등급을 ‘BB+ Credit Watch Positive’로 조정했다. 이는 90일 이내에 신용등급을 재평가하겠다는 것으로 향후 올릴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7월19일 발행된 신한투자증권 보고서에서도 ‘고비는 넘겼다’고 평가하며 SK이노베이션의 이번 합병이 재무 부담 완화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봤다.
전문가들은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을 SK 사업 구조조정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본다. SK 내부 관계자는 이처럼 계열사를 적극적으로 ‘쪼개고 합치는’ 합병·매각 구조조정이 SK 내에서도 유례없는 사례로 “얼떨떨한 것”은 맞다면서도 “사후 평가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선 SK다운 최선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고강도 사업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박상규 SK이노베이션 사장은 최근 직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2년 정도 힘들 것”이라며 ‘사투’를 예고했다. SK온의 실적 부진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전망 탓이다. 2021년 SK이노베이션에서 자회사로 분리된 SK온은 SK이노베이션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왔다. 2022년 말, SK이노베이션은 유상증자를 통해 SK온에 2조원을 출자하기도 했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에도 9조원 규모 설비투자를 예고했는데, 그중 배터리 사업에 투입할 예정인 금액은 83%에 해당하는 7조5000억원이다. 하지만 SK온은 10분기 내내 단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SK온의 총차입금은 2021년 12월 4조5390억원에서 2024년 3월 19조496억원으로 불과 2년여 만에 4배 이상 늘었다.
전기차·배터리 시장도 위축돼
SK온의 대규모 외부 차입금은 모회사 SK이노베이션과 지주회사 SK㈜의 차입 부담으로도 이어진다. 일련의 합병을 통해 SK이노베이션과 SK온의 체력이 보강됐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박상규 사장이 말한 ‘앞으로 2년’은 SK온의 상장 목표 시점이기도 하다. 2026년까지 일정 수익률 기준을 충족하는 상장을 하지 못할 경우 투자자들은 일종의 투자 안전장치인 ‘드래그얼롱’, 즉 ‘동반 매도청구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투자자가 보유 지분을 팔 때 대주주 혹은 창업주 지분까지 같은 조건으로 매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조건을 달고 투자를 유치했다는 점도 SK온이 악재에 내몰렸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SK온이 제 몫을 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전기차의 ‘캐즘(Chasm·신기술이 대중화되기 전 일시적으로 수요가 둔화되는 현상)’이 여전한 가운데,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 확률이 높게 점쳐지면서 전기차 시장이 위축되고 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7월29일자 기사에서 “한때 전기차와 배터리 제조업에 대한 장밋빛 전망으로 골드러시가 이어졌지만 이제는 생존경쟁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무리한 투자와 배터리 주요 소재 가격 하락으로 공급과잉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배터리 업체의 경우 중국의 물량 공세로 타격을 받고 있어서 활로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SK온의 반등을 위해 SK이노베이션은 7월17일 이사회를 열고 SK온과 원유·석유 제품 트레이딩 기업인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SKTI), 유류 화물의 저장과 입출고 사업을 하는 탱크터미널 사업자인 SK엔텀의 합병을 의결하기도 했다. 두 회사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SK온의 수익 창출원이 될 예정이다.
익명의 기업분석 전문가는 “자본시장에서도 SK에 대한 걱정이 많다”라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 중심의 에너지 사업에 미래 확장성을 더하려고 배터리 사업을 집중 육성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만 보면 실패한 수준이다. SK온의 배터리 사업을 다른 재벌 그룹이 인수하려 제안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지만 그만큼 SK가 배터리 사업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SK의 위기는 신사업 투자를 고려하는 기업들에 경종을 울린다. 재계 2위 기업의 생존을 건 도전은 시장의 냉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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