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은거한 쇠실마을…“독립운동사 홀대에 속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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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상하지요. 분통이 터져 잠이 안 와요."
김씨의 고향집(쇠실길 22-58) 대문 옆엔 '백범 김구 선생께서 은거하신 집'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김씨의 집 옆엔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이 있다.
안태훈 진사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김구 선생에게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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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처 후손 “백범선생 추모식
대강당 아닌 소강당서 열어 씁쓸”
“속상하지요. 분통이 터져 잠이 안 와요.”
지난 12일 오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서 만난 김태권(78)씨는 “요즘 뉴스를 잘 안 본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에 상징성이 있는 김구 선생의 후손이 독립기념관장 후보 추천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김씨는 해마다 6월26일 서울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열리는 백범 선생 추모식에 참석한다. 김씨는 “대강당에서 하던 선생의 추모식을 올해부터 소강당으로 옮겨서 하더라”고 했다.
김씨의 고향집(쇠실길 22-58) 대문 옆엔 ‘백범 김구 선생께서 은거하신 집’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인천 감옥에서 탈출한 뒤 ‘김두호’라는 이름으로 숨어 다닐 때였다. 그는 1898년 5월(음력) 종씨였던 고 김승묵(호 광언)의 집에서 40여일 동안 은거했다. 후손 김씨는 “맨 왼쪽 끝 방에서 선생이 지내셨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떠날 때 ‘동국역대’라는 책에 시를 적어 건넸던 백범은 1946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신분으로 쇠실마을을 다시 찾았다.
김씨의 집 옆엔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이 있다. 2006년 전남도와 백범선생기념사업회 후원으로 지은 이 공간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은거 기념관은 3칸짜리 작은 한옥(49.58㎡) 건물로 정자와 함께 세워져 있다. 고교 기술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퇴직한 후손 김씨는 “김구 선생은 두번째 투옥됐을 때 일제에 일곱차례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했던 모습에 존경심이 들었다”고 했다.
은거 기념관 한쪽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김씨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정근의 딸이 백범 선생의 장남과 결혼할 정도로 인연이 깊다”고 설명했다. 두 집안의 첫 매개가 된 것은 ‘동학’이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백범 김구 선생은 17살 때 동학농민혁명(1894~95)에 참여해 ‘아기 접주’로 이름을 떨쳤다. 안태훈 진사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김구 선생에게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고 제안했다. 김구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안 진사의 자택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안중근 의사와의 인연을 기록했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재주가 있었다. … 안 진사는 당시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8, 9세의 정근·공근에게는 ‘글을 읽어라’ ‘써라’ 독려하면서도, 맏아들 중근에게는 공부 않는다고 질책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김구 선생은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여관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했다.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동 김창수”라고 타살 포고문을 남겼던 그는 석달 뒤 체포됐다. 고종은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것을 알고 ‘전화’로 사형 집행 중지 어명을 전달했다. 김구 선생은 이듬해 3월 인천 감옥을 탈출해 서울과 광주, 함평, 강진 등을 돌아 쇠실마을로 왔다.
은거 기념관 옆 우물터 옆엔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김구 선생의 흑백 사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김구 선생이 우물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세월이 물처럼 흐르면 기억도 잊힐까? 후손 김씨는 “김구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의 역사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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