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한·미·일 동맹’의 허약한 기반
파리 올림픽과 사도광산 뉴스에 가려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사건이 있다. 지난달 28일 도쿄에서 한국·미국·일본 국방장관이 ‘한·미·일 3자 안보협력 프레임워크 협력 각서’에 서명한 것이다. 3국 국방장관이 일본에서 모인 게 역사상 처음이고 한국 국방장관의 방일은 2009년 이후 처음이다. 3국은 “한반도, 인도·태평양, 그리고 그 너머”에서 “안보협력을 제도화”하기로 했다. 1년 전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합의의 실행 계획이다. 한국 측 서명자 신원식 장관(이후 국가안보실장이 됐다)은 “3국이 표준작전절차(SOP) 합의에도 거의 이른 상태”라고 말했다. SOP는 효율적 작전 수행을 위한 단계별 지침이다. 이로써 한국군이 대만해협,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의 분쟁에 끌려들어갈 구체적 근거가 마련됐다. 사실상 ‘한·미·일 군사동맹’의 완성이다. 중요한 문서임에도 정부는 국회 동의를 받기는커녕 원문 제공도 하지 않았다.
1년6개월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속전속결 처리된 데는 윤석열 대통령 역할이 컸다. 한·미·일 안보협력은 한국 동의 없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윤 정부의 대일외교 기조 전환이라는 기반 위에 세운 구조물이다. 시작은 한·일 협력을 강조한 윤 대통령의 지난해 3·1절 연설이었다. 강제동원 배상 문제 등에서 한국의 화끈한 양보가 이어졌다. 일본은 물컵 반 잔을 채워달라는 한국의 소심한 요구를 걷어찼지만,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복원, 한·미·일 미사일경보정보 전달체계 확립, 한·미·일 다영역 연합군사훈련 정례화까지 일사천리로 나아갔다.
처음엔 나름대로 ‘국익’을 위한 고심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다. 빈번한 미사일 시험발사 등 북한발 뉴스가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의 대응이 필요했는데, 그러자면 미국의 숙원을 어느 정도 들어줘야 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한국에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라고 요구해왔다. 1965년 수교, 2014년 위안부 합의 등 한·일의 불완전한 합의 뒤엔 어김없이 미국의 압력이 있었다. 미 당국자들은 한국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다는 취지로 훈계하곤 했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데는 2차 세계대전 후 대일 강화조약에 한국의 참여를 막은 미국 책임도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했다. 미국의 상대적 국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대중국 견제망 구축이 시급하다고 느낀 바이든 정부 들어 그 압력이 더 강해졌을 수 있다.
한국의 ‘제3자 변제’ 해법 발표 이튿날인 지난해 3월7일,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 연구원이 한국 정부 요청으로 쓴 ‘한국이 일본과의 화해를 향해 대담한 걸음을 내딛다’ 기고가 워싱턴포스트에 실리자 외교부 관리가 “국가안보실장과 주미대사가 매우 흡족해했다”고 테리에게 감사를 표한 일은 윤 정부가 얼마나 미국을 의식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미국 측 인사들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이 그 정도로 화끈하게 양보할 줄 몰랐다는 반응이 많았다. 미국은 윤 대통령 정책이 한국 내 논란이 될 것을 알았지만 그건 한국 사정이고 이참에 한·미·일 협력 진도를 불가역적 수준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물이 7월28일 도쿄 3국 회동이다.
숙제를 해치운 건 미국이지만, 후련해하는 건 윤 대통령인 것 같다. 그는 최근 외교안보 참모에 군인들을 중용하고 외교관료의 입지를 축소했다. ‘3국 동맹’이 완성된 이상, 더 이상 번잡스러운 외교적 모색을 하기보다 안전한 ‘우리 편 외교’만 하겠다는 발상 아닌가.
이런 태도는 순진하고 위험하다. 한국의 지정학 여건을 고려할 때 한·미·일 협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나 지금의 정도는 과도하다. 한국이 조절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가속도를 냈고, 그 결과 3국 동맹이 ‘적’으로 상정한 나라들의 강한 반작용이 불가피하다. 한·미·일 전선의 맨 앞에 서 있는 윤 정부가 그런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행인지 불행인지 급하게 축조한 한·미·일 동맹이란 구조물이 잘 서있을 것 같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에 이어 기시다 총리가 14일 국내 지지율 급락으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도 허약하다. 그의 대일 정책을 추동한 요인이 뉴라이트 역사관이란 점이 분명해진 지금, 그 구조물은 한국 내 지지 부족으로 언제든 아래로부터 무너질 수 있다. 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장 인사, 일본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등에서 윤 대통령이 보여준 역사인식을 보면, 자신의 “최대 외교 성과”를 지키려는 최소한의 국정운영 기술조차 없는 것 같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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